[스크랩] [박대종의 어원 이야기] 돈(錢).무수리(水賜伊).言.인절미.봉창(封窓)
.
[박대종의 어원 이야기]
돈(錢)
청나라 사람 리좌현(李佐賢: 1807~1876)은 매우 영향력 있는 옛날돈 전문가이자 저명한 서화감상가였다. 그는 1873년 포강(鮑康)과 함께 고대 화폐 관련 저서인 <속천회(續泉匯)>를 저술한다.
그런데 거기 열국도(列國刀) 편에 우리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첨수도(尖首刀: 고대 선진 시기 도폐 계통 중 가장 이른 중국의 화폐)가 실려 있어 화제다.
사진에서와 같은 첨수도 상의 고대문자에 대해 주역연구가 이찬구 박사는 한글 ‘돈’자라고 주장, 이를 연합뉴스가 2012년 7월 2일 “한글 3천 년 전부터 사용됐다”라는 제하에 보도했다.
첨수도는 고대의 돈이고, 거기에 한글 ‘돈’이 새겨져 있으니 우리 입장에선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찬구 박사도 말한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훈민정음의 창제자이신 세종대왕을 욕되게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냉정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얼핏 보아 첨수도 상의 고대글자는 한글 ‘돈’과 그 자형이 유사하게 생겼지만, 검증할 때는 당연히 현대의 24자 한글이 아닌 28자 체계의 훈민정음과 비교해봐야 한다. 춘추시대(B.C.770~B.C.403)에 만들어진 첨수도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1443)보다 더 오래전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글자체는 질서정연한 이론과 원칙이 있었다. 훈민정음에서 ㄷ은 맨 윗 가로선에 비해 아래 ㄴ자가 더 오른쪽으로 옮겨가게 썼다. 그런데 첨수도 상의 ‘ㄷ’처럼 보이는 문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훈민정음 ‘ㅗ’는 가로선을 제외한 부분이 둥근 점이었는데 첨수도 문자는 그에 해당하는 부분이 생뚱맞게도 아주 긴 세로선이다. 또한 종성 ‘ㄴ’은 윗 모음과 미세하지만 간격을 두었는데 첨수도 문자는 그렇지 않으니 그것도 이상하다.
우리 국어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돈(錢)’의 어원은 “한 푼, 두 푼”할 때의 ‘푼’과 연결된 무게의 단위 ‘돈(푼의 10배)’이다. 금은 따위로 만든 구시대의 쇳돈은 그 무게로써 가치가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게의 단위 ‘돈’과 ‘푼’이 money의 뜻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러니 첨수도 상의 문자를 보고 ‘돈’자의 고대글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우리말 모음 ‘ㅐ’가 영어 H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과 같다.
[박대종의 어원 이야기]
무수리(水賜伊)
고려시대 몽고어 영향… '물 떠다주는 소녀' 의미
몽고군은 가히 세계적 군대였다. 고려 또한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인구의 감소, 극도로 황폐화한 국토, 황룡사 9층탑과 초조대장경 등의 소실은 물론 왕궁 생활에도 몽고의 법과 문화가 강요 및 유입되었다.
갑골문의 왕국이자 子씨 성의 은나라에는 동성의 왕후가 있었다. 무정(武丁) 임금의 왕후 부호(婦好)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동성 혼인을 금지시켰고, 그 이후 중화권은 문화가 바뀌었다. 그러나 은나라의 유민들이 세운 기자조선의 유풍 때문인지 고려의 왕실에는 여전히 동성의 왕비들이 있었다.
하지만 몽고 元나라 황실은 주례(周禮)만이 천자국의 법도인양 고려왕실의 동성혼 반대에 적극 개입했다. 충렬왕의 부인이 된 元나라 공주 홀도르게리미실은 조강지처 정화왕후 왕씨를 핍박했고, 원왕실은 세자 시절 충선왕이 정비 왕씨와 혼인하려는 것을 동성혼이라 하여 적극 반대했다.
정략결혼으로 인해 元의 공주들이 고려 왕궁에 들어오면서 몽고어 또한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는데 '무수리'는 그 대표적 예이다. 본래 무수리는 몽고어로 '소녀'를 뜻했다.
왕궁 궁녀들은 자신을 수발해줄 계집종들이 필요했다. 고려 때는 지금처럼 상수도가 없었다. 왕의 여인들인 궁녀들은 늘 몸을 깨끗하게 씻고 단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궁녀의 수발녀인 소녀=계집종=무수리의 주된 임무는 세숫물 따위의 물을 떠다주는 일이었다.
고려 왕실은 조선왕조처럼 한문을 국문으로 썼는데, 무수리 또한 한자기록을 요했다. 중국인들이 코카콜라를 可口可樂(중국음 '커코우커러')라고 번역하듯, 고려인들은 무수리를 水賜伊(수사이) 또는 水賜里(수사리)로 옮겼다. 중요한 것은 쓰기는 水賜里라 쓰되, 읽기는 이두향찰의 전통에 따라 '므스리' 또는 '무수리'라 읽었다는 점이다.
水는 물(고어로 '믈')인데, 그것을 줄여 '무'라 발음했고, 賜(줄 사)자는 중국음 '스'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처럼 한자로는 '물을 떠다주는 이'를 뜻하는 무수리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로 인해 후세에 그 자리매김이 더욱 공고화되었다.
[박대종의 어원 이야기]
言(말), 입에서 나오는 말은 허물의 근원… 신중을 기하라

단순히 '말하다(to say)'를 뜻하는 曰(왈)과는 달리 言(언)은 도끼를 왕권의 상징으로 하는 고대 왕조시대 때 말의 무서움을 전제로 깔고 탄생된 글자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 한 번 잘못했다간 심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왕조 사회'를 살펴보자. 우선 가까운 북한부터. 북한 사회가 말 한 번 잘못하면 수용소로 직행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체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왕조 국가이기 때문이다.
역시 왕조국가인 이씨조선을 거슬러 한참을 더 올라가보면 기자조선의 본향인 은(殷)나라와 만난다. 갑골문의 왕국으로도 유명한 은나라의 마지막 천자는 제신(帝辛)이었다.
사마천의 <사기, 은본기>에 따르면 주나라 무왕의 1차 침공 시도 후에도 제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음란 행위를 그치지 않자 성인이라 불렸던 충신 비간은 목숨을 걸고 왕에게 간언한다. 그러나 충언은 귀에 거슬리는 법, 제신은 화를 내며 "나는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다"며 "확인해보겠다"면서 비간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였다.
이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확인되는 '言(말 언)'자의 개념 또한 무서운 것이었다.
言은 '口(입 구)'자와 '辛(허물 신)'에서 아래쪽 가로선(一) 하나를 뺀 '허물 건'의 합자이다. 오늘날의 言자에서 '허물 건'은 口자를 뺀 나머지 부분으로 마치 一자가 상하로 네 번 겹친 것처럼 변형되어 있다.
옛말에 "三寸之舌(삼촌지설)은 萬禍之根(만화지근)이라"고 했다. 세치 혓바닥은 온갖 재앙의 근원이란 뜻이다. 이솝 또한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나쁜 일들은 모두 이 혀에서 시작된다"라고 했다.
이처럼 입(口)에서 나오는 말은 허물의 근원이라, 말을 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는 옛 조상들의 교훈과 경고가 담겨있는 글자가 바로 言이다.
물론, 우리가 이 점을 명심하고 이솝 우화에서처럼 말을 잘 사용할 경우 말은 허물과 흉기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도구가 될 것이다.
[박대종의 어원 이야기]
인절미, '잡아당겨 떼어 먹는다'→ 引切米
인절미는 고소하고 쫄깃한 맛이 일품인 전래의 떡이다. ‘인절미’는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토속한자어이고, 중국에서는 ‘?(자)’라 하였다.
후한의 문자학자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자)는 쌀로 만든 떡이다”라고 설명했다.
정확히는 찹쌀을 쪄서 밥을 하여 떡메로 쳐 만든 떡이 ?(자)인데, 그 표면에 콩가루를 바른 것은 粉(가루 분)자를 더하여 ‘粉?(분자)’라 불렀다.
떡썰기의 달인이었던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인절미 등을 또각또각 써는 모습은 곧 질서 있게 차례(次例)대로 잘라내는 모습이다. 그러한 모습에서 次(순서 차)자가 ?(자)에 들어있는 이유가 이해된다.
인절미는 떡이기 때문에 ‘餠(떡 병)’자를 써서 인절병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인절병은 ‘引切餠’이라 밝혀놓았지만 인절미는 그에 해당하는 한자를 써놓지 않았다. 그래서 왜곡된 설이 생겨났다. 이괄의 난 때 인조대왕이 충청도 공주로 피란을 갔는데, 林씨 성을 가진 사람이 진상한 떡을 맛보고는 임서방이 절미한 떡이란 뜻의 ‘임절미’라는 명칭을 붙여주었고, 그것이 후에 인절미로 바뀌었다고 하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仁祖) 임금의 재위 연대는 1623~1649년이다. 그리고 이괄의 난은 1624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인조 임금의 수레가 피란 차 공주로 향한 것은 1624년 2월 13일이며, 공주에 머무른 것은 그 해 2월 14일부터 2월 17일까지이며, 2월 18일 공주를 떠났다.
따라서 위 ‘林절미’ 설이 진짜라면, 당연히 ‘인절미’라는 말은 1624년 2월 이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림(林)→임→인’으로 변음 되었을 터, 아무리 봐준다 하더라도 1624년 2월 이전에는 그러한 말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어문학자 최세진(1468~1542)이 1517년에 쓴<사성통해>에 ‘인졀미’라는 말이 이미 나온다. 그러니 위 임서방설은 요즘 말로 뻥이다.
인절미는<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서 증명되는 것처럼 ‘引切米(인절미)’이며, 찹쌀을 불려 쪄서 떡메로 쳐 찰기가 생긴 떡이므로 매우 부드럽고 쫀득하여 쭈욱~ 늘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잡아당겨 떼어 먹으므로 ‘引(끌 인)’자를 썼고, 잘게 썰어 만들기 때문에 ‘切=截(자를 절)’자를 쓴 것이다.
[박대종의 어원이야기]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
단잠 자는 새벽에 창을 두드려 남을 깨운다
자다가 封窓(봉창) 두드리는 이는 누구일까?
옛말인 封窓(봉창)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봉(封)한 창(窓)'이다.
뭐로 봉했냐 하면 '창호지로 봉한=바른 창'이다.
채광과 통풍을 위해 벽을 뚫어 구멍을 내고 창틀이 없이 종이를 발라 봉한 창이 봉창이다.
그런데 이 봉창과 관련된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라는 속담에서 봉창을 두드리는 이는 누구일까? 잠자고 있던 사람일까? 아니면 말똥말똥 잠 안자고 있는 다른 누구일까? 얼핏 그 말로써만 보면 몽유병 환자처럼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엉뚱한 짓하는 사실상 잠자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세간에는 이 속담에 대해 '잠꼬대를 하며 봉창을 두드린다'는 뜻이라느니, '잠결에 봉창을 문인 줄 알고 열려고 더듬거리며 내는 소리'라느니 하는 해석이 돌아다닌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와 같은 말로 '새벽 봉창 두들긴다'란 속담이 있는데 요게 핵심이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 = '새벽 봉창 두들긴다'
이 '새벽 봉창 두들긴다'는 한참 단잠 자는 새벽에 남의 집 봉창을 두들겨 놀라 깨게 한다는 뜻으로, 뜻밖의 일이나 말을 갑자기 불쑥 내미는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현대에 맞게 이 속담을 바꾸면 한참 맛있게 새벽잠 자고 있는데 '꼭두새벽에 전화질 해댄다' 정도가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예의 없게 새벽에 전화하지 않는다. 돌출행동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옛적의 말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새벽에 남의 집에 전화하여 요란한 전화벨 소리로 남을 놀라 깨게 하는 모양처럼, 생뚱맞게 뜻밖의 일이나 말을 갑자기 불쑥 내미는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에서 두드리는 주체는 잠을 자고 있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남이다. '자는데 남의 집 봉창 두드린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속담 표현은 이미 오랫동안 굳어진 것이라 정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