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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혜장 스님에게 차를 좀더 보내달라고 보낸 글에서, 자신이 차를 탐하는 것은 차가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는 약이 되는 까닭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달빛 아래 차를 달여 혼자서 또는 스님과 함께 마시면서 세상살이에서 오는 마음의 갈등을 달래었다. 손님이 오면 으레 차로 대접하였고, 석 잔을 마신 후에야 비로소 대화를 시작하였다. 주인과 손님 사이에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차를 끓여 석 잔의 차를 마시는 그 동안의 침묵, 이 침묵의 시간이야말로 끽다삼매(喫茶三昧)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방엄사(訪嚴師)〉란 작품에서 차와 함께 나누는 대화의 참 멋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한 잔 차 마실 때마다 이야기가 하나씩
점차 오묘한 경지로 들어가누나.
이 가운데 즐거움 맑고도 담백하니
어찌 거나하게 취하야만 좋으랴?
一啜輒一話 漸入玄玄旨
此樂信淸淡 何必昏昏醉
주인은 자꾸만 차를 새로 따르고, 새 잔을 잡자 화제는 어느새 딴데로 옮겨간다. 차 마시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두 사람의 이야기는 깊어만 간다. 이 맑고도 담백한 경지를 모르고 술에 취한 풍류만을 찾는 세상 사람들이 안타깝지 않은가?
차는 대화의 벗이기도 하지만, 약의 효능도 있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병중전다(病中煎茶)〉란 시에서 차의 효능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금년 들어 쇠한 병에 갈증 부쩍 심해지니
이따금 즐겁기는 차 마실 때 뿐이로다.
맑은 새벽 찬 샘물을 길어와서는
돌솥에다 한가로이 노아차(露芽茶)를 달인다.
衰病年來渴轉多 有時快意不如茶
淸晨爲汲寒泉水 石鼎閑烹金露芽
뒤척이다가 새벽에 잠을 깨면 입이 바짝 말라 있다. 맑은 새벽 신선한 공기를 뚫고 나가 찬 샘물을 길어온다. 돌솥 앞에 앉아 금빛 차를 천천히 끓여낸다. 차를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마른 혀에 군침이 돈다. 맑은 새벽 돌솥에서 솔솔 이는 차의 향기. 병든 중에도 온몸이 가뜬하여 아픈 것을 잊는다. 또 그는
향과 빛깔, 그 맛은 논할 필요 없도다
마셔보면 정신이 맑아짐을 알리니.
不必更論香色味 啜來方覺長神精
라고도 노래하였다. 차를 마시면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맑게 되돌아 오기에 굳이 맛과 향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저 좋다는 것이다.
화려한 석류꽃은 푸른 가지 불태울듯
흰 커튼에 어리비쳐 햇볕 함께 옮겨가네.
향연은 사위었고 차가 보글 끓을 때
유인(幽人)이 그림 펼쳐 구경하기 알맞도다.
的的榴花燒綠枝 緗簾透影午暉移
篆烟欲歇茶鳴沸 政是幽人讀畵時
봄날 석류꽃은 초록 가지를 불태울 듯 붉은 꽃을 피웠다. 방안에는 흰 커튼이 쳐져 있고, 꽃 그림자의 붉은 빛은 오후의 햇살과 함께 방까지 비쳐들고 있다. 방 안 향로에는 연기가 가물대고 그곁에선 차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다. 주인은 옛 사람의 그림을 펼쳐 놓고 그윽한 감상에 빠져 든다. 속세의 시간도 이 속에서는 그대로 정지되어 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단양일집관헌(端陽日集觀軒)〉이란 작품이다.
이렇듯 차를 마시는 일은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는 일이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다연 속에는 물끄러미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한잔 차로 쉬었다 가는 긴장의 이완을 옛 선인들은 즐길 줄 알았다. 그것으로 가파른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잃기 쉬운 자신을 추스릴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