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방 2016. 1. 25. 01:53

스쳐간 첫사랑

 

“할아버지 어디 가시는 거예요?”

대로를 잘 달리다 갑자기 샛길로 방향을 틀자 녀석이 궁금한 모양이다.

“음, 잠시 들릴 곳이 있어서...”

몇 년 만인가? 꼭 50년이 되었다. 안동쪽으로 갈일이 있으면 항상 생각나는 곳이고 특히 이 부근을 지날 때면 언젠가는 가보겠다고 벼르고 벼르던 것을 오늘에야 결단을 내린 것이다.

초등학교 1년생인 손녀의 방학숙제를 위해 도산서원을 다녀오는 길인지라 때마침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

50년의 세월,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뀐다는 그 말이 실감난다. 그때는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었고 10리는 족히 되는 꼬불꼬불 모퉁이도 지나고 숨이 가쁠 정도의 언덕바지도 있었지만, 잘 닦여진 아스팔트 신작로 비탈길을 단숨에 넘었다. 모든 게 낮 설기만 했지만 네비게이션 덕분에 쉽게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그렇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지만 남향의 들판은 제법 넓은 편이었다.

한 성씨의 160가구가 옹기종기 들판을 감싸 안은 결코 작지 않은 동네였다.

저 쪽에 보이는 정자와 그 옆에 있는 고목은 기억이 남아있다.

“여기가 어디예요?”

“여기? 아주 옛날에 내가 농촌봉사활동 왔던 곳이야!”

“농촌봉사활동? 언제요? 그런데 왜 왔어요?”

“왜 왔을까? 그렇지 식혜 먹으러 왔지?”

“식혜? 점심때 먹었잖아요? 별로던데...”

‘나도 처음엔 그랬지,’ 식은 갱죽처럼 느껴졌을 뿐 아니라 시큼털털한 맛에 맵기까지 한 식혜를 처음 먹으면서 이게 무슨 맛인가 하며 억지로 먹긴 하였지만 함께 간 친구는 비위가 약했던지 첫술에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그런데 한 두 번 더 먹다보니 어느 틈에 식혜의 그 맛에 빠져들어 집집을 다니며 식혜를 배불리 먹곤 했었다. 무엇보다 고방에 저장한 큰 독에서 갓 떠온 얼음 살짝 어린 식혜의 그 맛은 잊을 수 없었다. 특히 배와 무채가 함께 씹히는 아삭 아삭 시원한 맛은 일품이었다. 해서 안동에 들릴 때면 반드시 식혜를 사먹어 보지만 그때만큼의 그 맛은 되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길죽한 무채가 아니라 조각조각 토막 난 무라서 그런지 씹는 맛이 영 아니었다.

“이곳 식혜는 맛있어~”

식탁이라야 너 댓개 밖에 없는 식당에 한 식탁에서 몇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를 먹고 있었다.

식혜 한 대접을 모처럼 맛있게 먹었다. 손녀 녀석도 낮보다는 잘 먹는 것 같았다.

“역시 이곳 식혜가 다르네요, 여기 아직도 남양 홍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요?”

“아직 많이 살고 있니더, 반 정도는 될끼라요”

“아주머니도 홍씨예요?”

“우리 집 양반이 홍씨 아니껴, 그런데 와 묻는교?”

“아, 예~ 내가 여기 오십년 전에 와본 적이 있어서~”

“오십년 전 이라고 예? 아이고 그때는 순 촌 골짜기 일낀데”

“맞심더, 참 골짜기였지예, 혹시 홍 순길씨라고 아실는지? 그때 이장님이셨는데...”

“그 사람 우리 아제되는 분인데, 어떻게 아시유?”

건너편에 술을 마시고 있던 한 남자가 불쑥 말을 건넸다.

“그때 한 보름간 그 댁에서 살았지요, 그러고~ 아 그분 이름이 뭐더라 4H회장하시던~”

“정호형님 말인가?”

“예, 예 맞습니다. 홍정호님, 그 겨울철에도 냉수마찰하던 분인데,”

술좌석에 있던 사람들은 눈이 둥그레지며 이쪽을 바라보더니 그 중 두 사람이 건너 왔다.

“선상님은 누구시니껴? 어디서 왔니껴?”

“꼭 오십년 전 이맘때 적십자 봉사활동 왔던 학생입니다.”

“뭐라구요? 적십자 봉사활동? 그때 그 학생이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그 학생이시네”

그 사람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나 역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옆의 사람도 내 손을 잡았다. 그들의 모습이 기억은 없으나 어릴 때 고향 친구를 보는 것처럼 조금도 낮 설지 않았다.

“아이고 반갑습니더, 몇 년만입니꺼?"

두 사람은 일행을 보내고 아예 우리와 합석을 했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내 보다 두 세살 아래였다.

“그래 그 이장님은 아직 살아 계신가요?”

“아니지요. 연세가 얼만데, 벌써 돌아 가셨니더, 십년도 더 됐을 껀데~”

“그러고 보니 그 분 제사가 엊그제 였구먼~ 올해는 문상 때문에 못 가봤는데, 그렇지 가 한테 연락해보이시더”

“누구 말입니까?”

“누구긴 범조라고 그 집 장손 말이더”

누나 둘에 나이차가 좀 있던 막내둥이 초등학생이었다.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 자넨가? 날세, 자네 지금 어디 있는겨? 이리로 오게나, 기억할랑가 모르겠네만 오십년전 적십자 선상님, 그러치! 알제, 어여 와, 여기 계셔”

그는 면소재지에서 구십넘은 노모를 모시고 농기구 대리점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온다면 그녀의 소식은 들을 수 있을까? 사실 여기까지 온 것은 그녀가 가장 많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당시 여중 졸업반이던 그녀는 진학을 하겠다고 시내에서 자취하며 삼수까지 하였으나 끝내 진학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산골 처녀로 살다가 결혼하여 영주에 살고 있단다.

‘만약 그녀가 대구에 올 수 있었다면...’

누가 연락하였는지 한 사람이 더 합석하면서 우리들은 잠재되었던 세월을 오가며 얘기꽃을 피우며 껄껄대었다. 4H회장이던 분은 안동 근교에서 과수원을 제법 크게 하고 있다 했고 최희준의 ‘하숙생’을 허스키한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부르던 중2학생은 대구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동이 트기 전 아침 7시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호루라기로 잠든 아이들을 깨워 조기청소를 시키고는 적십자사에서 보낸 준 물 건너 온 학용품이나 사탕 등을 나눠 줄 때는 그야 말로 산타크로스가 되었다. 구급약품이나 해열제, 진통제, 구충제(산토닝)덕분에 본의 아니게 돌팔이 의사가 되기도 했다. 4H 청년 회원들과 제설작업 한다며 어설픈 삽질에 웃음거리가 되는 가하면, 늦은 밤에 화투판 노름을 말리다 건방진 놈이라고 눈구덩이 속으로 내동댕이 당하기도 했다.

“동상 왔는가? 기억나는감? 인사드려”

“알고 말고예, 아이고 선생님, 얼마 만이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입니더”

“허어~ 선생님은 무슨~ 그래 어머님께서는 잘 계시고요”

초등학생이던 그도 반백의 머리에 눈가엔 잔주름이 뚜렷하였다.

그는 제사 때문에 온 작은 누님을 역으로 배웅해주고 오는 길이라 했다. 역으로 가는 중에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라고 보니 누님을 억지로라도 모셔올걸 그랬구만, 우리 누님이 선생님을 억시기 좋아했는 거 알지예?”

“그래요?”

그녀를 데려오지 못한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으나 시침을 뚝 떼었지만 입술연지를 바른 것처럼 붉었던 그녀의 예쁜 입술이 눈에 선했다.

그때 그녀는 마을의 유일한 여중생으로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허, 연옥이만 그랬나? 동네 처자들 모두 여기 도회지 두분 총각 선생님때문에 얼마동안 바람 많이 들었지 뭐~ 연애편지 쓴다고 지들끼리 모여서 깔깔거리며 난리였지...”

“아, 참 그때 아가씨들 모두 잘 있겠지요,?”

“아가씨는 무슨 아가씨, 손자 손녀 다본 할망구지,”

“그래도 내게는 아가씨로만 기억되는데요, ‘내 이름은 소녀’라는 노래를 잘 부르던 그 처자는 어디 살아요? 이름이 명조였지~ 그라고 ‘동숙의 노래’ 잘 부르던 명화라는 처자는...?”

“허, 선상님 기억력도 좋으시네, 명조 누야는 동네 명가수였니더, 읍내 콩쿨대회에서 상도 타고, 모두 시집가서 아들 딸 놓고 잘 살고 있지러”

라디오가 없어 이장님 엠프하나에 집집마다 설치된 소위 유선 방송으로만 방송을 들을 수 있던 그들이 유행하는 노래는 어떻게 배웠는지 도심의 우리보다 노래는 더 많이 알고, 노래 솜씨 또한 음치 박치인 내 눈에 가수가 무색할 정도였다.

“선생님 송별식 때 우리 누님하고 둘이서 노래 부르던 거 생각나니껴? 그때 참 보기 좋던데”

함께한 친구 녀석의 짓궂은 제의로 그녀와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 망설이던 중 그녀가 선곡한 곡이 ‘그 집 앞’이었다. 첫 음정도 제대로 못 잡는 나는 그녀의 선창에 이끌려 어물쩍 노래하였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갑자기 그가 노래를 부른다. 감정까지 넣어 제법 불러본 솜씨다.

‘~ 되오며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야 잘한다. 박수~”

“우리 누님이 노래를 그렇게 잘 하는지 몰랐는데 그날 노래를 듣고서 이 노래가 내 애창곡중 하나가 되심더. 우리 누님은 요, 누군가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아입니꺼, 그 누군가가 아마 선생님이지 싶은데, 맞지예?”

나는 대답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녀도 그랬을까? 우리가 머무는 사랑채까지 매일 밥상을 들고 오던 그녀였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몰래 몰래 눈길이 머물렀고 그러다 그녀가 볼까 두려워 고개돌리면서도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다시 고개를 돌려보곤 했었다. 늦은 밤, 식혜를 가져오는 그녀를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그날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이 보게 동상, 그 노래보다 선생님한테는 이 노래가 더 좋다 아이가? 해~당화 피고 지는~”

“그 노래 나도 알아요!”

저쪽 테이블에서 태블릿으로 어린이 프로를 보고 있던 손녀가 앙증스럽게 쳐다보았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러지며 손녀에게 집중하였다. 누군가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그 노래 밖에 안 해요’라는 대답에 모두들 박장대소하였다.

맞는 말이다. 내가 가장 많이 부른 노래이자 좋아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저녁 7시 30분부터 가정응급처치법이나 건전놀이 지도 보급하는 야간 학습시간에 초등학생 꼬맹이들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7시40분부터 하는 연속극 때문이란다. 어쩔 수 없이 8시로 늦추었다. 그참에 우리도 방송반이었던 친구의 도움으로 유선방송 스피커를 강의장인 4H회관으로 끌어들여 그 연속극을 주민들과 같이 듣고서 학습교육을 시작했다.

내게는 연속극보다 주제가였던 노래가 더 좋았다. 어쩌면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제목, 아니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이란 가사가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총각 선생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마침 사범대학인지라 장차 선생님이 될 사람들이 자나 깨나 불러야할 노래인 것처럼 떠받들어 교가인양 불렀다. 사회에 나와서도 동기회를 할 때면 이 노래로 부터 시작하고 끝을 맺었다. 이렇게 수 십 년을 애창하다 보니 그 노래는 내 마음 한 구석에 화석처럼 자리 잡아 내면화가 되었기에 음치 박치인 내가 마이크 잡고 음정 박자 구애받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그것밖에 없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럼 꼬맹이 아가씨, 한번 불러봐~”

제 어미를 닮았음인지 음정 박자는 제법 맞출 줄 아는 녀석이다. 비록 동요같이 부르긴 했어도 가사 하나 틀림없이 잘 불렀다.

모두들 박수를 치며 입안으로 따라 하다가 어느 틈에 큰 소리로 합창을 하였다. 누구는 젓가락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1절에 이어 2절로 넘어가며 더더욱 큰소리로 불렀다. 이번에도 ‘대구에는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였다.

그때도 이렇게 합창으로 아쉬움을 지닌 채 송별회는 끝났었지. 눈시울 붉히며 이슬 맺히던 그녀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 아쉬움을 더하였다.

그녀와는 소위 ‘펜팔’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이 멀다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쓰는 즐거움, 편지를 기다리는 즐거움, 그리고 편지를 읽는 즐거움으로 1여년이라는 세월이 후닥 지나버렸다.

‘사랑’이라는 말, ‘보고 싶다는’는 말조차 감히 쓰지 못하고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All for the love of a girl)' 이나 소월의 ’가는 길‘등의 가사나 시로 대신한 사랑이었고 그리움이었지만 끝내 사랑이란 말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두고두고 아리었다.

고입, 대입 서로의 수험준비에 몰두하고자 진학 후를 약속하였으나 시험을 며칠 앞두고 그녀는 가정 사정 때문이었는지 진학을 포기해야할 것 같다는 편지를 보내고는 소식이 두절되었다.

‘여고생이 되겠다는 꿈은 나에게는 사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수씨와의 주고받은 편지는 나의 꿈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언제까지 간직할 것입니다.’

그 편지를 받고서 곧바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망설임만으로 끝내 가보지 못하였다.

식혜 한 사발을 얻은 채 그들의 손짓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 때 그날은 많은 주민들이 동구 밖까지 배웅해주었고 꼬맹이들은 눈보라 십리 길을 따라 나섰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올 때까지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보름동안의 쌓았던 정을 차마 떼지 못해 눈물을 훔치던 아이들을 보며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비탈길 넘어 학교 앞 정류소가 보인다. 초로의 한 여인이 양손에 보퉁이를 든 채 서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어디로 가십니까? 시내로 가시면 태워드리지요,”

“역까지...”

여인은 고맙다며 얼른 뒷자리에 탔다.

언 듯 백미러를 통해 본 여인의 모습이 누군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이내 부정하고 말았다.

“이 동네 사세요?”

“아네요, 손녀인가 보죠? 아주 귀엽고 참하네요,”

“예, 외손녀지요, 이 녀석 숙제 때문에 도산서원에 갔다가 오십 년 전의 추억을 찾아 이곳에 잠시 들였지요”

“어머나 오십 년 전의 추억을 찾아서요? 대단한 추억이 있었나 봅니다!”

“있었지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졸지에 총각 선생님이 되었던 곳이니까요,”

“그래요? 뭔 일을 하셨기에~”

“허허 별거 아니었어요, 적십자 봉사활동 한 것인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는 동요를 끄고 다른 음악을 켰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첫사랑인 그녀가 생각나고 그녀가 생각날 때면 이 노래를 부르곤 했지요, 허허”

“어머, 섬색씨가 사랑을 한 게 아니라 총각선생님이 사랑을 한 거네요.”

“그런 셈이죠, 그러나 사랑이란 말은 한 마디 하지 못했어요,”

얼마동안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하던 그녀가 느닷없이 질문을 했다.

“첫사랑의 그 아가씨가 예뻤어요?”

“물론 예뻤지요! 정말 예뻤어요!”

“할아버지, 외할머니보다 더 예뻤어요?”

음악을 바꿀 때부터 또 그 노래냐며 삐죽거리던 녀석의 또랑또랑한 질문에 심히 당황스러웠다.

“요 녀석, 그런 질문하는 게 아니야.”

“하하~ 오늘 집에 가서 사모님께 혼나시겠어요~ 얘야 얘기하면 안되,”

....

집에 와서 뒤 좌석 짐을 챙기다 보니 낮선 물건이 있었다.

‘에고 그 여자가 잊어버리고 갔구나!’ 그 물건을 들었더니 쪽지가 끼어있었다. 눈에 익은 필체였다.

‘오셨다는 얘기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동생이 함께 가자는 것을 애둘러 거절하였지만 안절부절 하다가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외길이지만 혹여 만나지 못할까봐 얼마나 조바심을 했는지,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요. 수 십 년을 간직했던 첫사랑, 열일곱 소녀의 꿈을 함께한 첫사랑. 아직도 소녀의 설렘이 남았던 가 봅니다.

편지로만 써봤던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때의 내 모습이 아니기에 차마...

언제까지나 소녀의 그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명수씨가 맛있게 먹던 식혜가 생각나서 준비했습니다. 구십넘은 엄마가 만든 것입니다.‘

“할아버지 무슨 편지에요?”

“그 아줌마가 고맙다고 식혜를 두고 갔구나~”

‘그래 그 입술은 여전히 예쁘더구먼~’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여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끝.

2016.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