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의 역사기행10( 수정본)
하늘에서의 역사 기행
- 10부 일본으로 건너간 소도(蘇塗)
우술천자께서 즉위하신 후 선왕의 덕을 기리고자 죄수들을 방면하셨고 위법을 저지른 백성에게도 “오물구덩이가 비록 더러우나 비와 이슬은 가리지 않고 내리느라.” 하시고 죄를 논하지 않으셨다. 위법한 자가 그 덕에 크게 감화되어 스스로 천자님의 덕을 널리 퍼뜨리니 모든 백성들이 천자님을 숭앙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창해 욕살 우착(于捉)이 군사를 일으켜 왕궁을 침범하니 단군께서는 상춘으로 피난하여 구월산 남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임시로 도읍을 옮긴 후 우지와 우속을 보내 우착을 토벌케 한 후 3년 만에 환궁하셨다. 환궁하시어 30년간 덕으로 통치하시어 태평성대를 이루시다 재위 35년에 붕어하시고 우가 출신의 노을(魯乙)단군께서 추대되셨다.
노을천자께서는 재위 59년이었다. 재위 중 궁문 밖에 신원목(伸寃木)을 세우고 백성들의 억울함이나 하소연을 호소할 수 있게 하여 백성들의 삶을 구석구석 몸소 챙기시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재위 16년에는 동문 밖 10리 길에 땅에서 연꽃이 피는가 하면 천하(天河: 바이칼 호수)에서는 등판이 윷판 모양과 같은 신령스런 거북이 출현하여 국운이 융성할 길조라고 만백성들이 좋아하였다. 그랬음인지 발해 연안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13석(130말)이나 되는 금괴를 채굴하여 나라의 재정을 더욱 튼튼하게 할 수 있었다.
11세 단군 도해(道奚)천자는 노을천자의 태자였으며 57년간 나라를 다스리셨다.
등극원년에는 오가에 명하여 불함산, 백악산 등 12개 명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을 택해 국선소도를 설치하여 그 둘레에 박달나무(壇樹)를 심었고 그중 가장 큰 나무를 환웅천황이 상주하신다는 뜻으로 웅상(雄常)이라 이름하며 3월과 10월에 상제님께 제사를 올리셨다.
또한 국자랑을 가르치는 사부이자 스승이었던 유위자(有爲子)의 헌책으로 환웅을 모시는 성전을 건축하여 대시전(大始殿)이라 이름 지으니 그 모습이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대시전 신단수 아래 환화(桓花) 속에 정좌하신 환웅의 모습은 머리 위에 광채가 찬란하여 마치 태양이 온 우주를 환하게 비추는 듯했다. 손에는 천부인을 쥐고서 자애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모습이 실로 살아계시는 신의 모습이셨다.
대시전 누각에는 천·지·인이 하나임을 뜻하는 대원일(大圓一: 깃발이 나부꼈으며 천자께서는 그 깃발을 초대 환웅의 또 다른 이름이신 거발환이라 명하셨다. 이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우주광명 속에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대시전이 완성되자 천자께서는 삼 일 동안 재계(齋戒) 후 뭇 백성들에게 “인류의 시원국가인 환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상제님의 신교문화를 받들고 환웅의 홍익이념의 진리를 깨달아 마음에 아로새기고 생활화하여 진정한 환국, 배달의 후예가 되라”는 내용을 이레 동안 강론하시니 그 덕화의 바람이 사해를 움직였다.
또한 천자께서는 그 내용을 정리하여 돌에 새겨 만방에 전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염표문(念標文)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하늘은 아득하고 고요하며 광대하도다. 그 도는 두루 미치어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참되어 만물을 하나 되게 하느니라! (天 以玄黙爲大 其道也 普圓 其事也 眞一).
땅은 하늘의 기운을 모아서 위대하나니 하늘의 도를 본받아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쉼 없이 길러 만물을 하나 되게 하느니라! (地 以蓄藏爲大 其道也 效圓 其事也 勤)
인간은 지혜와 능력이 있어 위대하도다. 사람의 도는 천지의 도를 선택하여 원만하고 그 하는 일은 서로 협력하여 더 크고 하나 된 세계를 만드는 데 있느니라! (人 以知能爲大 其道也 擇圓 其事也 協)
그러므로 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 사람의 성품은 삼신의 대 광명에 통해 있으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人 以知能爲大 其道也 擇圓 其事也 協)』
천자께서는 농산물의 생산을 장려코자 각지의 특산물을 모아 진열케 하니 천하 백성들이 다투어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여 산처럼 쌓였다.
더불어 송화 강변에 배, 노, 기물(器物) 등을 생산하는 제조창을 만들어 나라와 백성들에게 두루두루 쓰이게 하였다. 재위 38년에는 처음으로 장정을 대상으로 일정기간 징집제를 실시하여 상비군을 운영하면서 외침 등에 대비하셨다. 같은 해 지식이 풍부한 선비 20명을 뽑아 속국 하(夏)나라에 파견하여 천부경, 서효사, 염표문 등 국훈(國訓)을 가르치게 하시어 나라의 위엄과 명성을 드높였다. 재위 57년에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통곡하기를 부모같이 하였다.
뒤를 이어 우가의 아한(阿漢)께서 12세 단군으로 추대되어 등극하셨다. 천자께서는 등극 초기에 전국을 순행하시다가 요하(현재의 난하) 서편에 이르러 역대제왕의 명호가 기록된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나라 문자(가림토)로 새겨 세우고 이어 사방 국경에 관경비를 세우게 하여 나라의 강역을 확고히 하셨다.
“음~ 창해역사가 비석을 보고 시를 지었다는데 이 비석을 말하는 모양이네.”
동생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중얼거리듯 한 말이었다. 이어 중국인 친구에 말을 건넸다.
“강 형, 창해(滄海) 역사(力士)를 아시오?”
“창해역사라니?”
내가 되물었다.
“알다뿐입니까?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120근의 철퇴를 지닌 괴력의 무사 여홍성(黎洪星) 아닙니까?”
“맞아요. 그 여홍성이 이곳을 지나다 이 비석을 보고 시를 지었는데 시문(詩文)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곳이 단군이 다스리던 흔적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여홍성? 옛날 중국 무협영화에 진시황 암살에 대한 영화를 몇 편 보긴 했지만 여홍성은 처음 듣네만.”
“제가 말씀드릴게요. 지금부터 천오백 년 후에 나오는 얘기입니다만 『사기』, 「유후세가」에 의하면 시황의 진(秦)이 초(楚), 연(燕), 제(齊), 조(趙), 위(魏), 한(韓)을 멸하고 천하의 패권을 잡자 한나라의 장량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구원을 청하였지요. 이때 왕모병이라는 사람이 창해역사 여홍성을 소개해 주었는데 여홍성이가 순행 중인 진시황의 마차를 저격하였으나 수행원 마차만 부수고 진시황을 죽이지 못한 사건입니다.”
“그러고 보니 들은 것 같구먼, 그런데 창해가 어디지?”
“우리나라 강릉 지방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강릉에 가면 창해역사를 기리는 비도 있습니다.”
“강릉이라니? 그러면 강릉에서 여기까지 수천 리를 왔다는 말인가?”
“저도 그게 좀 이상합니다. 강 형은 창해가 어디라 알고 있어요?”
“이 역시 한참 후의 얘기입니다만, 한 무제가 조선족인 남려(南閭)와 예군(濊君)이 (위만)조선에 반기를 들고 귀순하자 그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했지요. 당시 연나라와 제나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지금의 발해만 지역을 얘기합니다.”
“그렇지, 발해만이라면 여기서 가까우니까 이해가 되네.”
“형님, 이건 아무래도 고조선이나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음모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무심코 넘겼는데 여기 와서 보니 사실이 왜곡되었음 알게 되었습니다.”
“강릉이 좋다 말았네만 아닌 건 아니지.”
천자께서는 재위 29년에 청아욕살 비신과 맥성욕살 돌개 그리고 (서)옥저 욕살 고사침을 임금에 준하는 제후(汗)로 봉하셨다.
“동생 우리가 지난번에 낙랑공주 때문에 갔던 곳이 옥저였는데 한반도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옥저가 있네그려.”
“『삼국유사』 발해 조에 (만리)장성 남쪽에 옥저가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옥저라는 말은 ‘울창한 삼림이 있는 곳’이란 뜻인데 이곳 말고도 지역별, 시대별로 몇 군데 더 있습니다. 삼국지나 후한서 등 우리 중국 역사에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 등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옥저는 조선반도 북쪽인 것 같고 북옥저는 치구르지역이고 남옥저는 북옥저에서 800리나 떨어진 요동반도 부근이고요.”
“그러면 동옥저가 우리가 봤던 그 옥저인가?”
“동옥저도 이곳 (서)옥저가 위만정권 당시 한반도로 이주하여 다시 부활시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곳 옥저가 1,500년 이상 조선의 제후국으로 존재했다는 건가? 대단하구먼, 그런데 왜 우리는 한반도에 있는 옥저만 알고 있지? 지역이 다르고 정치 단위도 다른데, 누군가 장난질한 것 같아. 꼭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용어혼란 전술처럼 말이야.”
등극하신 지 52년에 붕어하시고 우가출신 흘달(屹達)단군께서 즉위하셨다.
13세 흘달천자께서는 나라의 지방 조직을 주현(州縣) 체제로 정립하시고 관직을 분리하여 벼슬아치들이 겸직치 못하도록 하여 관리들의 권한남용을 제도적으로 막으셨다. 또한 모든 정치는 법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함으로써,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은 스스로 법을 따르면서 각자의 생업에 만족하며 천자를 칭송하는 노래 소리가 나라에 넘쳐흘렀다.
재위 16년 겨울, 제후국인 하나라의 걸왕(桀王)이 신흥 은나라의 침입을 받아 구원을 요청하자 천자께서는 읍차 말량에게 군사를 주어 돕게 하시면서 두 나라의 전쟁을 중지토록 하셨다. 이에 은의 임금 탕(湯)은 사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천자께 사죄하며 천자의 주재로 두 나라가 불가침맹약을 한 후 서로 군사를 돌렸다.
그러나 왕비 말희(妺喜)의 치마폭에 싸여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폭정을 일삼던 하의 걸왕(傑王)은 맹약을 어기고 은나라를 공격하므로 천자께서는 대노하여 은나라와 함께 걸왕을 치니 마침내 하나라는 멸망하였다.
“아, 설마 했던 주지육림이 사실이었군요. 그리고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실감나는군요.”
“강 형, 중국에는 경국지색이 많지요? 한낱 여자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나라를 멸망시킨 은나라도 주왕(紂王)의 달기(妲己)라는 여인 때문에 망했고, 주(周)나라 유왕(幽王)은 포사(褒姒) 때문에 나라가 망했지요.”
“달기 때문에 포락지형(炮烙之刑)이란 말이 생겼다지요.”
“예, 천하의 독부라 알려졌지요~”
강 씨는 달기와 포사에 대해 내가 궁금해 하자 두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허허, 자고로 임금이 주색에 빠지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라지만, 주색에 빠진 임금이 나라를 망하게 한 거지 여인이 망하게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형님, 그게 그거죠 뭐, 미색에 안 넘어 갈 남자가 있던가요?”
그사이 천자께서는 은밀히 책사 신지 우량을 동이 9족의 하나인 견군(畎軍)에 보내 낙랑군사와 합세하여 관중(關中: 지금의 섬서성)의 빈(邠: 섬서성 순읍현의 동쪽)과 기(岐: 섬서성 기산현의 동북쪽)를 점령하여 관청을 설치하고 통치토록 하셨다.
재위 50년의 오성취루의 축제 현장을 다시 보아도 그 감동은 그대로였다.
“하나라 은나라가 조선의 제후국이었다니…….”
중국인 강씨의 푸념이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니 신령님이다.
벌써 기간이 끝났음인가 싶어 아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다른 두 사람도 똑같은 표정이었다.
“벌써 끝났습니까? 아직 가볼 곳이 많은데…….”
“아닐세, 아직 시간은 많아. 자네들과 함께 여행하고 싶다는 혼이 있어 데려왔다네.”
그러고 보니 신령님 옆에는 웬 남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우리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나이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겐조라 합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선생님들과 동행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오셨군요. 반가워요 겐조 씨, 난 한국에서 온 복가입니다.”
“환영합니다. 난 중국서 온 강이라 합니다. 재미있는 여행일겁니다.”
“난 김가 사람이요. 저 사람처럼 한국에서 왔는데 이제 동양 삼국이 다 모여 더욱 재미있는 여행이 되겠어요.”
한 사람씩 악수하며 인사말을 나누던 일본 친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선생님들 일본말을 무척 잘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웃었다.
“우리가 일본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겐조 씨가 한국말, 중국말 잘하는 거요!”
중국인 친구가 한 마디 거들자 일본인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옆에서 바라보던 신령이 설명을 해주자 일본이 친구는 겸연쩍은 모습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신령은 때가 되면 데려오겠다며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일본 친구는 동경대학에서 역사학 박사과정에 졸업을 앞두고 결혼하였는데, 신혼여행 중 강도를 만나 총에 맞아 아내는 살고 자신은 죽었다고 했다.
“쯔쯧 젊은 나이에 안타깝군, 겐조 군. 여기 모두가 안타까운 죽음들이지만 어쩌겠는가? 각자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새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사는 거지. 공부를 하다가 왔다 했으니 여기서 못다 한 공부를 다시 해보시게나.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네.”
“저도 그러고 싶어 심판장 신령님께 얘기했더니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잘 왔어요. 아~ 내 막내동생뻘 되는데 형씨를 동생이라 불러도 되겠어요?”
강 씨의 제안에 일본인은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생과 나에게도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이에 강 씨도 동생과 나에게 작은형님, 큰형님으로 모시겠다며 화답했다. 엉겁결에 내가 맏형이 된 셈이다.
“막내, 여기가 어딘 줄 아시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여기가 어디죠? 작은 형님.”
“옛 조선국 14세 단군 고불(古弗)천자님 시대일세.”
“예?! 단군조선이라고요? 단군조선이 맞습니까?”
“단군조선을 아는가?”
“예, 작은 형님. 제가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니 한국고대사와 연관되는 부분이 많아 고조선도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습니다만 실재한다니 놀랍습니다.”
“단군뿐만 아니라 배달, 환국도 실재하던 걸!”
둘째인 중국인 친구가 신이 나듯 한 말이다.
막내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하며 여행에 동참하였다.
재위 56년에 천자께서는 전국 사방으로 관리를 보내 호구조사를 실시하셨으니 백성들의 숫자가 1억8천만이었다.
고불천자에 이어 대음(代音)천자께서 15세 단군으로 대통을 이으셨다. 재위 2년에 창해 사수(蛇水)땅(발해만 일대)에 큰 홍수가 나 많은 백성이 피해를 입게 되자 왕경의 곡식을 풀어 구제하셨고 그해 겨울에는 12환국 중 양운, 수밀 두 나라에서도 방물을 바쳤다.
재위 28년에는 태백산(백두산)에 오르시어 옛 성조들과 제후국 왕들의 공적을 새긴 비석을 세우셨으며 재위 40년에는 아우 대심을 남선비(南鮮卑: 내 몽골지역)국의 추장으로 봉하셨다. 재위 51년에 붕어하사 우가 출신 위나(尉那)께서 16세 단군으로 즉위하셨다.
위나 천자께서는 재위 28년에 아홉 환족의 모든 왕을 도읍지 아사달의 소도(영고탑: 寧古塔)에 부르시어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환인천제, 환웅천황, 치우천황, 단군왕검천자를 배향(配享)하셨다. 그리고 5일간 큰 연회를 베풀어 백성과 함께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워 천부경을 봉송(奉頌)하며 마당 밟기를 하셨다.
여느 백성들은 횃불을 줄지어 밝혀 신단수를 가운데 두고 손잡고 둥글게 춤을 추며 천지화를 기리는 노래(愛桓歌)를 불렀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도 만 그루 심었어라.
봄이 찾아와 불함산 꽃이 온통 붉으니
상제님 섬기고 태평세월 즐겨보세.』
“큰 형님, 저 춤이 조선의 강강술래와 너무도 흡사합니다. 한편으로 미국 인디언들의 고스트 댄스(Ghost Dance)와도 닮았고요.”
막내도 신이 나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아하, 막내는 처음 보겠구먼, 환국 배달이래 수천 년 내려오는 춤일세.”
내가 한 마디 거들어 주었다.
“수천 년 내려온 춤이라 했습니까? 지금 이 조선보다 수천 년 전에도 나라가 정말 있었습니까?”
“막내, 그게 환국과 배달이라는 나라야. 여기서 보는 조선은 앞선 두 나라의 종통을 이어온 나라인 셈이지. 소도는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상제님을 모시는 성소이고.”
둘째가 마치 갓 전입한 신병에게 가르치듯 말한다.
“사실 일본의 신사(神社)가 조선의 소도에서 유래된 것이고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 역시 조선의 제천행사의 풍속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던 학자(동경대 구니다케 교수)도 있었습니다만 여기서 보니 그 주장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이들 후손들이 일본으로도 이주하였을 테니.”
“아, 생각난다. 연전에 대마도에 역사문화탐방을 한 적이 있는데 제사(祭祀)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를 솟도(そっと: 率土 땅끝)라고 하였어. ‘솟도’와 ‘소도’ 같은 뜻 아닌가?
첫째 동생이 힘주어 말했다.
“맞습니다. 소도에서 유래된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솟도가 진자(じんじゃ: 神社)로 변하면서 신사 입구에 있는 상징물인 도리이(とりい: 鳥居)는 새가 머물고 있다는 뜻으로 소도의 솟대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군요.”
“그러면 천신을 모시는 신단수(神檀樹, 神壇樹)도 있겠네 그려? 여기에서는 천신이자 환웅천황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그중 가장 큰 나무를 웅상(雄常)이라고 한다만.”
내가 되묻듯이 말했다.
“그렇군요. 일본에서는 히모로기(ひもろぎ: 神籬, 신리)라 하는데 다시 말해서 신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신이 곰(熊)입니다.”
“곰? 그것도 혹시 배달국의 곰 부족의 여왕 웅신(熊神)에서 유래된 것 아닌가?”
이번엔 둘째가 되물었다.
“저도 공부를 하면서 그 같은 생각을 하였는데 작은 형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신이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가져온 7가지 신물(神物) 중의 하나입니다.”
“천일창? 동생, 천일창이 누구인가? 들어본 적 있는감?”
나는 첫째 동생에게 물어 보았다.
“저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우리 일본 11세 스이닌(垂仁)왕의 기록에 나온 얘기입니다만 무엇 때문인지 제가 『삼국사기』 등 신라의 기록을 찾아봐도 그에 대한 기록은 없더군요.”
“그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이외의 책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 가령 지금 현존하지 않지만 거칠부가 쓴 『국사』 같은 책에는 있을 수 있겠지.”
“일본에서 만든 조작된 인물이 아닌가?”
중국인 동생이 불쑥 꺼낸 말이다.
“조작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왕자가 왔다는 시기인 스이닌왕의 재임기간이 백여 년 차이가 있다는 논란이 있긴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 일본 역사가 조선보다 짧다는 열등의식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일본 왕가의 재위기간을 120년 앞당겼다는 일본 학자의 주장을 본 적이 있어.”
“스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라는 교수입지요.”
첫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막내가 한 말이다.
막내가 말하자 곧 둘째가 묻는다.
“그런데 일본 왕과 신사와는 무슨 관계이지? 그리고 신사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모든 고대 국가에서는 비슷하겠습니다만 우리 일본도 왕과 신은 같은 개념입니다. 천손의 왕이 천신을 받들고 섬기는 것이니 왕과 신은 같을 수밖에 없겠지요. 일본인은 그 신을 받드는 것을 신도(神道)라고 합니다. 일종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지만 모든 종교의 상위개념으로 생각하는 거죠. 때문에 일본인은 교회나 절에 다녀도 신사에 별도로 참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사는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며 신사참배는 생활의 일부입니다.”
“흠 그래서 일본에는 10월이면 신들의 축제로 야단인 모양이지.”
“맞습니다. 큰 형님, 매년 10월이면 신을 맞이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별로 ‘가미아리즈키: 신이 있는 달(神有月)’, ‘간나즈키: 신이 없는 달(神無月)’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흐흐, 둘째 형님, 문화 탐방하시면서 들어보신 적 없어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일본에는 10만 가까운 신이 있는데 10월 10일이 되면 전국의 모든 신들이 이세신궁(伊勢神宮: いせじんぐう)에서 7일간 모임을 갖는데 이세신궁 입장에서는 ‘신이 있는 달(가미아리즈키)’이 되고 다른 지역에는 ‘신이 없는 달(간나즈키)’이 되는 거지요. 때문에 이세신궁에서는 신을 영접하고 신이 계심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리는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함과 동시에 신의 감시나 통제에 잠시 벗어나 일탈(逸脫)을 즐기는 행사를 벌입니다.”
“이거 재미있구먼, 우리 한국에서도 그런 풍속이 있지 영둥할멈이나 윤달 같은 거지.”
“그게 무엇입니까?”
둘째와 막내가 동시에 물었다.
“음력 2월, 소위 꽃샘추위의 날이라 하지만 민간 신앙에는 영둥할멈(조왕모: 竈王母, 竈王神)이 바람을 타고 상제님께 올라가기 때문에 그 바람 때문에 춥다는 거지.
할멈께서 상제님께 가는 이유인즉, 상제님으로부터 인간들의 1년간의 일을 살펴 보고하라는 명을 받아 섣달 그믐날 밤에 몰래 내려와 행적을 조사하는데, 이때 인간들은 몰래오는 할멈이 혹시 못 찾아올까 봐 온 집안에 대낮같이 불을 켜두고 기다린다네. 또한 행여나 볼 수 있을까 하여 뜬눈으로 지새우기도 하지. 만나면 이런 저런 하소연과 소원을 빌어보고자 함이겠지.
한 달 동안 조사한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2월 초하루 영둥바람을 타고 상제님께 가는 것이야. 그래서 2월을 바람의 달이라 하는데 이때 결혼을 하면 남자나 여자나 바람을 잘 피운다 해서 결혼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지만, 제주도에서는 이때가 이사철이야. 그 이유는 손재수가 없는 달이기 때문이라지만 실은 할멈이 각각의 잘못한 것을 상제님께 일러바친 것 때문에 이사를 하면 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거야. 허허.
윤달도 마찬가지, 윤달은 덤으로 생긴 달인지라 소위 감독하고 주관하는 신이 없는 달이기도 하지. 그래서 이때 이장(移葬)을 하는 등 궂은일을 해도 부정(不淨)을 타지 않는다고 하는 거지. 아마 손(損) 없는 날이라는 게 신 없는 날에서 유래된 것 같아.”
“듣고 보니 그럴 듯합니다.”
첫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세신궁으로 가는 거지?”
“거야 물론 천황이 있는 곳과 가까운 곳이니까요. 원래는 시네마 현의 출운대사(出雲大社: 즈모 오호야시로 혹은 이즈모 타이샤)에서 모였습니다만 메지유신 이후 이세신궁으로 옮겼습니다. 큰 형님.”
“그래 이즈모 대사는 들어본 적 있구먼.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과 관련 있다는 말도 있고 한국에서 온 신을 모신 곳이라고도 하고.”
“둘째 형님 말씀처럼 조선과 관련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신사가 향하는 곳이 조선의 포항 경주 쪽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즈모 인근 ‘미호노세키’(美保關)에 있는 미호신사(美保神社)는 신라왕손을 모시는 신사입지요.”
“오호! 이세신궁으로 옮긴 것이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 같구먼?”
“글쎄요, 이세신궁은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오미가미)이란 여신을 모신 신사인데 점차 ‘왕실의 신’으로 정착되었고 메이지유신 이후 그 위상을 더욱 높이면서 전국 모든 신사의 위계질서를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정리하며 황권을 강화하고 근대화를 도모하였습니다. 이세신궁이라 하지 않고 ‘신궁’이라고 불리고 있을 정도로 모든 신과 신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천조대신을 궁중의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왕이 즉위할 때 반드시 그 신을 받드는 의식을 치른다면서?”
첫째의 물음에 막내는 고개만 끄덕이더니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잇는다.
“사실 이세신궁은 ‘고황산령존(高皇産靈尊: 다카미무스비노미코트)’이라는 천신을 모신 곳이었으나 신라 천일창 왕자와 손잡은 스이닌 왕이 그 신을 몰아내고 천조대신을 신궁의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런데 천조대신은 사실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는 무녀였습니다. 무녀가 신이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쿠데타인 셈이지요. 막후에는 천일창이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신들의 전쟁이었나?”
둘째가 빈정거렸다.
“그 후 천조대신은 8세기 이후 교토로 수도를 옮긴 칸무왕이 왕가의 황조(皇祖)신으로 내세우면서 일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도 내각이 바뀌면 총리 이하 전 각료가 이곳을 찾아 천조대신께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신궁은 20년마다 본궁의 자리를 옮기는데 이를 식년천궁(式年遷宮)이라 하며 그 비용이 가히 천문학적입니다.”
“음, 일본사람이나 정부가 신사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있구먼.”
“신도야말로 일본의 국교네요.”
둘째가 내 말을 곧이어 받아 한 말이다.
“우리 일본인의 조상이 언제부터 일본 땅으로 이주하던가요?”
“글쎄다. 흔히 말하는 구석기 시대부터이긴 하지만 그때는 일본 땅도 대륙에 붙어 있을 때였으니 굳이 이주라고 볼 수 없겠지. 그들이 현재 일본인들의 직접적인 조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배달 때부터 시작하여 단군조선 후기 때 일본으로도 많이 이주하였잖습니까? 배달 때는 북쪽에서, 조선 후기 때는 한반도를 경유해서 말입니다.”
첫째가 내 말에 부연하였다.
“역시 그렇군요.”
“일본이 조선과 한 줄기임은 부인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사실이군요.”
“그런 셈이지. 막내, 일본왕실계보는 어떤가?”
첫째가 둘째의 말을 이어받아 막내에게 물었다.
“일본왕실계보는 아주 복잡합니다. 전설상의 인물로부터 실존 왕에 이르기까지 2,600년의 만세일가(萬世一家)라 하지만 멀리는 고조선으로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왕권쟁탈이 있었지요. 마지막에는 백제계가 왕권을 장악했습니다만.”
“그런가? 2,600년이라면 대단한 역사를 가졌구먼!”
“2,600년이라지만 그중 반은 전설상의 인물이고 역사이긴 합니다만…….”
“언제 시간 나면 거기도 여행해 봄세.”
“그런데 막내, 한일고대사를 연구했다 했으니 『삼국유사』도 읽어 봤겠지?”
“물론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기본이지요. 왜 그러시는데요?”
“음, 내가 『삼국유사』에 대해 의문이 좀 있어서…… ‘석유환인’이란 말 아는가?”
“예, 단군조선 신화에 나온 기록이 아닙니까?”
“신화가 아니고 사실이야!”
둘째가 강조하듯 말했다.
“저도 여기 와서 신화가 아님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만.”
“자네가 봤다던 『삼국유사』는 어디에 있는 자료이지?”
“그야 제가 다니던 대학도서관이지요.”
“그렇지, 형님, 동경대학 도서관에 잠깐 들리시죠? 『삼국유사』를 확인 좀 해야겠습니다.”
“『삼국유사』를? 거기 책이라 해서 다를 게 있는가?”
“‘석유환국’, ‘석유환인’ 확인 좀 해 봐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암튼 가 보세나, 막내가 안내하게나.”
막내의 안내로 동경대학교 역사자료실로 이동하였다. (11부에서 계속)
“~일본인은 그 신을 받드는 것을 신도(神道)라고 합니다. 일종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지만 모든 종교의 상위개념으로 생각하는 거죠. 때문에 일본인은 교회나 절에 다녀도 신사에 별도로 참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사는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며 신사참배는 생활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