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논문

용두방천에서 건들바위까지

둥지방 2015. 3. 13. 00:49

대구 한의대 평생교육원 문화해설사반 수료  리포트 스토리 텔링입니다.  원본이 없어 본문중 사진이 누락되었습니다

 

용두방천에서 건들바위까지

 - 잊혀진 대구천의 흔적을 따라 -

                                                                                                                                       문화해설사  양 종균

1.머릿말

용두방천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바로 이곳이 용두방천입니다.

대덕산 줄기가 비껴나며 마치 용이 물을 먹기위해 엎드린 자세로 수성천 즉 대구천의 물줄기를 감싸고 있는 바로 이곳이 용의 머리 부분이기 때문에 용두골이라는 이름과 함께 용의 꼬리부분인 고산골입구 상동교구간까지를 용두 방천이라 했습니다.

용두골이 달비골과 관통하는 터널공사로 크게 훼손되어 유감입니다만 40여년 전만해도 가창골짜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원 물줄기 즉 용계천과 용두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보니 제법 넒은 면적에 많은 수량으로 어떤 곳은 한 길 이상 되는 깊은 곳도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조약돌부터 집체만한 바위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모래밭과 하천에 깎여서 생겨난 동굴(河蝕洞窟)과 절벽(河蝕崖)도 있어 이 방천과 맞대고 있는 대덕산과 함께하는 주변 경치가 좋아 학생들은 소풍을 오거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렵과 멱감기를 즐기던 곳이었습니다.

 .......

저도 초중고 학생시절에는 십리길 멀다않고 이곳에서 노닐곤 했지요.

언제부터였는지 신천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물도 더러워지고 마치 하수처럼 변하여 이곳을 지날 때 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겁니다.

 때마침 신천살리기 운동이 전개되고 비록 하수의 재처리된 물로 인공으로 물을 흘러 보내긴 하나 과거에 비할 바 아니지만 물이 흐르고 물고기도 되살아나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더하여 대구시에서는 2012년경에 가창까지 금호강 물을 끌어와서 이곳에 방류한다니 용두방천은 물론 신천이 더욱 좋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불어 작년부터던가요? 이곳에 자연 물놀이장 즉 야외 수영장을 만들어 꼬마들이 풍덩풍덩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가마득한 옛 추억이 되 살아 납니다.

 잠시 팔공산에서 흐르는 桐華川과 함께 금호강의 2대 지류 중의 하나인 신천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할까요?

 

2. 신천의 유래

 (1) 이서와 신천

신천 즉 한자로 새 新. 내 川이라 하니 새로 생긴 하천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정조2년인 1778년 당시 대구 판관인 이서라는 분이 대덕산-수도산-동산-달성공원 앞을 거쳐 금호강으로 유입되는 하천때문에 홍수 때마다 큰 피해를 입어 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물줄기를 현재의 신천으로 돌렸다고 전해오는 얘기 때문에 옛것에 대비하여 신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사실 저도 얼마 전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였지요.

신천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보니 잘못 알고 있었던 내용인지라 참고삼아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신천이란 명칭은 이서판관이 제방을 쌓았던 18세기 보다 몇 백년이나 앞서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여지지도, 동국지도, 등에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그 위치도 현재의 신천과 비슷합니다.

또한 신천이라는 명칭은 대구 분지사이 즉 대구부와 대구부의 속현인 수성현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의 ‘사이천’ 또는 새천(샛강)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誤記되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이서와 李公堤

그러면 이서가 쌓은 제방은 어디일까요? 대구 판관으로 부임한 이서는 신천이 범람하여 백성의 폐해가 큼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재산을 털어 제방을 쌓았고 백성들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 제방을 李公堤라 하며 송덕비와 제공비를 세웠습니다.

 현재 상동교와 인접한 이서공원에 있는 이서의 제공비가 원래 지금의 대백프라자와 수성교 사이 방천시장 입구에 있었던 것을 미루어 볼 때 1736년 영조12년에 축성된 당시 대구읍성과 그 일대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인명과 재산을 범람과 침수로 부터 예방하기위해 상동교에서 방천시장을 연하는 수성교까지 제방을 쌓고 나머지 산격동에 이르기 까지 자연둑을 보강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100여년 후 수성교부근 제방이 훼손되어 범람하게 되자 군수 이 범선이가 사재를 털어 보수하여 백성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이 범선 不忘碑를 함께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서의 제방으로 인해 물줄기가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던 대구천이나 달서천은 이서에 의해 물줄기가 돌려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1930년경에도 존재하였음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이 도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달서천이나 대구천이 지나는 저지대의 수로를 신천쪽으로 변경하면서 달서천과 대구천은 흔적만 남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달서천이나 대구천이란 이름은 일제 전까지의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일제가 명명한 것으로 보이며 이 역시 신천과 같이 ‘사이내’나 샛강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3) 대구천, 달서천, 대명천

용두방천에 몸을 담군 용의 머리 부분에서 고산골 입구까지 경관이 수려하고 기암이 많아 무당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용왕님께 치성을 드리는 장소로 널리 애용되었습니다. 지금도 치성을 드리기 위해 촛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앞산 즉 대덕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고산골 입구인 효성타운 부근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대구천으로 이곳 용두방천으로 다른 하나는 봉덕시장 남구청 미 8군(캠프헨리) 후문쪽 수도산을 경유하여 건들바위 근방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반월당 계산성당 부근 동산에서 대명천과 합류하여 오트바이 골목으로 유명한 인교동을 지나 달성공원에서 달서천과 만나 침산동에서 금호강으로 유입합니다.

또 하나는 유신학원 네거리, 구중앙도서관, 대구광역시청 옆, 칠성시장을 거처 도청부근에서 신천과 합류합니다.

대구천?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지요.

 이제 이곳 용두방천에서 대구천이 흐르던 곳으로 방향을 돌려 대구천의 흔적을 따라 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용두골에서 흘러온 물줄기는 삼정골의 물줄기와 합치면서 효성타운 옆을 돌아 봉덕시장쪽으로 흐르면서 대구천은 시작됩니다.

 

3. 삼정골, 용두골, 고산골

삼정골이란 지금의 남구 구민운동장과 대덕맨션, 미리내 맨션일대의 골자기로서 지금부터 약 8,9십년전에 10여가구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가구수가 불어나게 되자 두 개의 우물로서는 식수가 부족한 지라 50여년 전 주민들의 치성과 산신령의 도움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1개의 우물을 더 파게되어 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삼정골이라는 이름이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물 두 개는 30여년전 상수도 저수장의 설치로 없어지고 산신령의 도움으로 팠다는 우물은 봉덕동 1384번지 손 종대씨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효성타운은 1970년대 말까지 오늘날 하양에 있는 효성 카톨릭대학의 전신인 대구의 유일한 여자대학인 효성여자대학이 있던 자리이며 대구의 아파트 붐이 일던 시절 당시로서는 최고급아파트 대단지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시설 용두골로 소풍가면서 효성여대의 켐퍼스를 통과하며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대학생 누나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본 기억이 있습니다.

 

 4. 기린산, 봉덕동, 이천동

물길은 봉덕시장쪽을 지나는데 봉덕동이란 일제때 지명개편 때 봉산동과 덕산동일부를 합하여 봉덕동이 되었다고 하나 그 이전에 이미 봉덕동이란 명칭이 전해졌다합니다.

잠시 후 들리겠습니다만 수도산과 관련있는 것으로 수도산의 원래 이름이 麒麟山이었으며 신라말기 계속되는 흉년으로 나라 사정이 어려울 때 이 동네 살던 촌장이 못을 파고자했으나 번번히 실패하던 중 도인이 나타나 기린산 웅덩이의 물을 저녁마다 떠서 정성을 드리라는 말에 따라 며칠간 정성을 드렸더니 어느 날 봉황이 나타나서 물을 먹고 간 후 물줄기가 잡혀 훌륭한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그 촌장은 세 아들은 두면서 봉황의 의미를 두어 큰 아들은 대봉, 둘째는 봉덕, 셋째는 봉산이라 이름을 지었고 그들이 거주하던 곳이 대봉동 봉덕동 봉산동이었으며 후에 그들은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였다하여 기린산을 삼봉산이라고도 불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물길은 이천동의 캠프 헨리 서문과 수도산사이로 흐르면서 오늘날 이천동 고미술 문화거리일대의 이천교 부근에서 현재 복개된 대백프라자앞을 경유하여 신천쪽으로 빠지는 梨泉川과 대구천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도산과 건들바위 쪽을 거처 유신학원 네거리에서 반월당 방향과 대구시청쪽으로 두 갈래로 흐르던 대구천은 1924년 일본사람들이 추진한 도시계획사업으로 그 흐름이 멈춰지기 시작합니다. 즉 이천교에서 대백프라자가 위치한 신천 쪽으로 높은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죠.

대신 대구천의 물길은 이천천으로 돌려져 수도산을 연하는 건들바위일대는 습지로 변하고 수도산절벽아래 습지 가까이에는 논 밭으로 조금 높은 평지는 과수원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그후 인구가 늘어 주변에 마을이 확대되고 개발되면서 습지마저 사라지게 된겁니다.

이천동이란 원래 수도산 밑에 배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배나무실 또는 배나무골이라 했고 그 밑에 맑은 샘이 솟았다 하여 속칭 ‘배나무 있는 샘’이라는 말의 ‘배남샘’이라고 불리어지면서 한자로 梨泉으로 표기된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이곳에 살았습니다만 그러니까 50여년전만 하더라도 수도산 밑은 배나무가 많았으며 동네이름이 ‘배남샘’이었음을 기억합니다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대봉동에 속한 동네였다가 1980년에 남구 이천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5. 캠프헨리(camp Henry)는 캠프워커(camp Walk), 캠프조지(camp George)

캠프헨리(camp Henry)는 캠프워커(camp Walk), 캠프조지(camp George)와 더불어 대구에 있는 주한 미 8군 기지의 하나입니다. 세 기지는 일제 때 병영으로 사용하던 것을 6.25이후 미군이 사용하게 되었는데  헨리는 1950년 안동지구에서의 전투로 훈장을 받은 2사단 소속 헨리중위의 이름을 딴 것으로 205,100㎡, 약 62,000평의 규모에 후방기지사령부와 대구지구사령부 건물 및 군 수송부, 장교 및 사병 식당 등의 시설물을 갖추고 있습니다.

캠프워커는 6. 25전쟁 중 교통사고로 죽은 1군단장의 워커중장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고 748,600㎡, 약 226,500평의 규모로 A-3 비행장과 골프장, 군인가족 숙소, 민간차량대기소 및 주유소, 민간인학교, 장교, 사병클럽 및 PX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명 8동에 있는 캠프조지는 63,900㎡,약 19,300평의 규모에 장교숙소와 체육시설 및 놀이터 등의 시설이 있습니다.

이들의 세 기지는 남구 및 앞산 발전의 적지 않은 걸림돌로 대두되고 있어 기지 반환 및 이전 등의 현안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지요.

캠프헨리의 후문쪽에서 캠프워크에 이르는 일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들의 유흥가로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더불어 야한 분장을 한 소위 양공주들과 미군들이 흥청되던 곳이었며 양주나 미군 PX물품의 암거래가 성행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술꾼들이나 한량들이 미군 전용 클럽이나 카바레에서 술을 먹거나 춤을 추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삼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6. 수도산, 서봉사

캠프헨리와 북쪽으로 마주한 수도산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麒麟山 또는 三鳳山으로 불리어 지다가 일제 때 1914년 상수도 사업의 일환으로 대봉배수지를 만들고 1933년 보조수원지를 만들면서 수도산이라 속칭하게 되었습니다.

배수지란 정수장으로부터 온 물을 수요자에게 적기에 적량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는 시설로 대체적으로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구에는 40개의 배수지가 있습니다.

수도산에는 배수지외 보시는 바와 같이 서봉사라는 비구니 절이 있습니다. 수도산 정상에서 대구 시가지를 내려보며 자뭇 웅장한 모습에 古刹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만 지금부터 80여년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信女가 조그마한 절을 지어 기린사라 했다가 신도가 늘면서 1960년대에 이르러 삼봉산의 봉황과 연관지어 瑞鳳寺로 개명하였고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침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들리는군요. 잠시 종소리를 들어 봅시다.

더-엉~ 덩~, 더-엉~ 덩~, 더-엉~ 덩~

제법 은은하게 들립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물론 교회에서 나는 종소리와는 확연히 구분이 되시죠?

이참에 잠깐 종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할까요?

 

7. 동양종, 서양종

우선 종의 모양에서 서양종은 나팔꽃을 뒤집은 모양이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종은 물항아리를 뒤집은 모양이며 서양종은 종의 몸통안에 추가 있어 몸통을 매난 지랫대를 움직여 종이 움직임에 따라 추가 몸통내벽을 때려 소리를 냅니다만 동양종은 몸통은 용두에 의해 매달린 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외부의 목공이로 외벽 몸통의 정해진 부위 즉 당좌에 타격을 주어 소리를 내게 합니다.

크기나 무게에 있어서는 서양종은 높은 종탑에 매달아 종 자체를 움직여야했기 때문에 동양종에 비해 작고 가벼울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양종은 땡~땡하는 쇠 소리의 가벼운 음색의 소프라노에 비교할 수 있으며 동양종은 둔탁한 듯하면서 가슴 깊이 심금을 울리는 은은한 소리를 냅니다.

동양종은 한국, 중국, 일본의 종이 대표적이며 그중 한국의 종이 모양이나 음색, 그리고 주조법등이 뛰어날 뿐아니라 예술적 가치도 탁월하여 ‘조선종’이라는 학술명칭으로 분류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종의 우수성과 중국, 일본의 것에 비해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할까요?

 

(1) 한국종의 특징과 우수성

좋은 종 즉 우수한 종이란

첫째 : 종소리가 맑고 잡음이 없을 것,

둘째 : 종소리가 여운이 길 것,

셋째 : 여운에 뚜렷한 맥놀이가 있을 것 등의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한 종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종은 일본이나 중국 종에 없는 종 상단부의 고리부분의 대롱모양의 음관(音管) 또는 음통(音筒)과 지표의 울림통 또는 명동(鳴洞)이 있어 다른 나라에서는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작고한 서울대 금속공학과 염 영하 교수는 모형실험을 통해 음관이 잡음을 뽑아내는 필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하면서 또한 종의 아래에는 바닥을 둥글게 파둔 명동이라는 공간이 음을 울리는 공명동의 역할을 해서 은은한 여음을 내는 것으로 분석하였습니다. 특히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는 종 고리부분에 최소의 힘이 작용하도록 절묘한 위치에 있어 이것이 종소리의 여운을 길게 하고 종의 수명을이 늘어나게 해줍니다.

그러면 에밀레종이라고 불리우는 신라 ‘성덕대왕 神宗’을 예로 들어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2) 에밀레 종(성덕대왕 신종)

숭실대 배 명진 교수는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가 다른 종들에 비해 3배나 높은 고주파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대부분의 종들은 기본주파수가 160Hz인데 성덕대왕신종은 477Hz이라는 것입니다.

배교수는 “어린아이가 ‘에밀레 에밀레’라며 엄마를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지듯이 이 종은 애끓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477Hz의 고주파 소리대역이 마음을 잡아당기는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남의 마음을 잡아 뜯는 듯한 애끓는 종소리를 들으면서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은 독특한 맥놀이 주기 때문입니다.

 맥놀이 주기란 음이 한 번 커졌다 줄어드는 과정에 걸리는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성덕대왕신종은 맥놀이 주기는 2.7초인데 이는 인간이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주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에밀레 종을 한번 타종하면 그 음의 진동이 10초 이상 유지되면서 진동이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타종을 함으로서 앞의 소리와 겹쳐 즉 맥놀이가 형성되어 오묘한 소리를 내게하는 것입니다.

한국과학기술원 김 양한 교수도 96년 연구에서 “이런 맥놀이가 거듭됨으로써 소리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고 밝히면서 10여리 밖에서도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덕대왕신종은 초기의 종치는 소리가 사라지고 여운이 긴 청아한 소리를 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카이스터 기계공학과 김양한 교수도 신라시대 장인들도 울림통의 깊이를 조절해가면서 종소리를 더 멀리 가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매달린 종의 아래 지표면에 파인 울림통의 깊이가 종소리를 오래 유지시키는 비결로 확인된 것입니다.

종을 칠 때 종안에 들어있는 공기의 주파수도 진동하는데 울림통의 깊이를 조절하면 어느 순간 내, 외부의 주파수가 일치하면서 종소리가 더 멀리 간다는 것입니다.

 (3) 에밀레종의 미스테리

1975년 경주국립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에밀레종을 매달기 위해 첨단과학기술을 동원하여 포항제철에서 제작한 고리가 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파손되어 원래의 것을 겨우 찾아 매단 적이 있습니다만 길이 2.91m, 종 너비 2.2m, 무게 18.9톤의 거대한 종을 신라인들이 어떻게 주조했는가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요즘은 용해로, 전기로, 기중기 등의 거대한 장비들로 종을 만들지만 신라인들이 이런 도구 없이 이렇게 많은 양의 청동재료를 한꺼번에 녹이고 굳기 전에 틀에 부어 형상을 완성했을지 현재로서도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에밀레 종은 음향학, 진동학을 응용한 설계와 최적화된 주조방식으로 만들어진 시대를 앞서가는 우리문화유산입니다. 참고적으로 에밀레종을 만들기 위해 정말 어린애를 집어넣었을까요? 이런 의문은 많은 과학자들에게도 수수께끼였습니다.

1998년 포항산업과학연구원에서 극미량원소 분석기로 종의 성분을 철저히 분석했으나 성덕대왕신종에서는 사람의 뼈에서 나오는 성분인 인(燐)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연구원측은 “사람의 비중이 구리보다 가벼우므로 전설처럼 아이를 넣었다면 위로 떠서 타기 때문에 이를 불순물로 생각해 제거했다면 인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또 다른 학자는 인은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제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만 에밀레 신종의 소리가 아기 봉덕이가 엄마를 애절하게 부르는 듯한 에밀레~ 에밀레~ 하는 소리만큼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역인 건들바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8. 건들바위와 대구 10경

 (1) 서거정과 건들바위

 건들바위는 그 모양이 삿갓 쓴 늙은이 같다고 해서 삿갓바위 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건들바위 이름의 유래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건들바위 뒤로 보이는 저 절벽 즉 하식애는 대구지역의 지반구조를 잘 나타내 주고 있어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조선초기 대구 출신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문장가이신 서 거정선생이 입암조어(笠巖釣魚)란 시제로

『가랑비 조록조록 가을 물가 내리는데(煙雨空?澤國秋)

낚싯줄 드리우고 홀로 앉아 하염없이 생각하네(垂綸獨坐思悠悠)

잔고기는 낚싯밥 아래 다소 있음을 알겠는데(纖鱗餌下知多小)

황금 자라를 낚지 못해 멈추지 않네(不釣金鰲釣不休)』 라는 내용의 시를 읊을 만큼 대구에 서 가장 빼어난 10경중의 하나입니다.

(2) 대구 10경

여기서 잠시 서 거정 선생이 말한 대구의 10경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지요.

원래는 10영(大丘十詠)이라 했습니다만 반드시 구체적인 경치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풍광도 있으며 각 10경별로 七言絶句의 시를 지어 풍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第一景이 금호범주(琴湖泛舟)라 하여 금호강에서의 뱃놀이 광경이며 

 第二景이 이곳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건들바위가 삿갓모양이 아님을 이유로 이곳이 아니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사실 건들바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第三景이 귀수춘운(龜峀春雲)으로 지금의 제일여중자리인 거북산의 봄 구름이며

第四景은 학루명월(鶴樓明月)로서 북성로 쪽에 지금은 없어진 금학루의 밝은 달을 지칭하였고

第五景이 남소하화(南沼荷花)라 하여 남소의 연꽃을 일컷지만 남소가 현재 영선시장인 영선못이라는 설과 달성공원안의 연못 또는 서문시장에 부근에 있던 천왕당 못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당못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第六景은 북벽향림(北壁香林)으로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 1호인 도동의 측백나무 숲이며

第七景은 동화심승(桐華尋僧)으로 동화사를 찾는 스님의 모습이고

第八景이 노원송객(櫓院送客)으로 팔달교 부근에 있던 노원 여관에서의 손님과 이별하는 광경(?)(당시는 驛의 역할을 한곳임), 아마 헤어지기 아쉬워 밤새워 이별주를 마시는 모습인 듯합니다.

第九景이 공영적설(公嶺積雪)로서 팔공산에 쌓인 눈의 풍광이며

第十景은 침산낙조(砧山落照)로 오늘날 오봉산인 침산의 저녁노을을 말합니다.

(3) 현재의 건들바위

아무튼 이곳 건들바위 일대는 수도산으로 연결되는 절벽을 끼고서 맑고 깊은 물이 흘렀기에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낚시를 즐기는 명소로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여기 표지판 설명에 200여년전만해도 이 같은 모습이 있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서의 제방으로 이곳의 물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초기 일제 시대 때 도시정비사업에 의해 물길이 돌려진 것으로 본다면 적어도 100년 전에도 옛 모습을 간직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건들바위 명성 때문에 건들바위 네거리라는 도로명칭이 생겼습니다만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은 간데없이 너무나 퇴색된 모습에 많은 시민들이 안타까워하자 대구시에서는 1994년 종합조경공사를 실시하여 이처럼 분수와 폭포를 설치하고 물이 흐르도록 하여 옛 정취의 일부라도 살리고자 했습니다만 100년전의 아름답던 그 모습은 영영 찾을 수 없겠지요?.

조선시대와 근대까지 이곳은 또 무당이나 점쟁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고 저 바위의 모습때문인지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녀자들이 와서 기도를 하는 기자신앙(祈子信仰)의 대상이 되어 초사흘 , 초이레가 되면 촛불켜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당이나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부녀자들이 많이 찾던 이곳에는 현재 교회가 들어서고 그 건너편에는 불교방송국이 자리를 잡고 있어 묘한 느낌을 줍니다. 감사합니다. 끝

 

참고자료

1. 대구역사기행(향토사 교육연구회. 도서출판 나랏말 출판 1996년)

2. 대구 新 택리지(거리문화 시민연대, 북랜드 출판)

3. 대구관광 스토리텔링

4.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유 홍준. 주식회사 창비. 1997년)

 5. 전 영권, 신천유로에 관한 새로운 해석(한국지리학회지 제 10권4호.2004년)

6. 성덕대왕 신종 종소리의 비밀(소년 한국일보 기사.2008. 12.16)

7. 최 성영, 성덕대왕 신종의 종소리 특성 규명 및 재현에 관한 연구(학국시뮬레이션학회 논문집 제14권 제4호.2005. 12)

8. 기타 관련 웹문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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