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 5층 석탑에 새겨진 백제의 위용
부여에 있는 定林寺址 5층석탑은 백제의 멸망과정 등 명예스럽지 못한 내용이 기록되어있지만 그 내용 중에 백제의 국력을 나타내는 글귀가 있다.
『 凡置五都督府 戶二十四萬 口六百二十萬 』‘5도독부를 두었으며, 24만호에 인구가 620만 이다.’ 5도독부란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을 말한다. 실제 웅진도독부외는 행정상 구분에 불과하며 그것도 백제인을 도독으로 삼았다가 신라가 백제전역을 실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자 웅진 도독부도 중국의 요서지방으로 철수하였다.
그런데 웅진도독부는 백제 도읍지에 위치하였으나 마한, 동명, 금련, 덕안의 도독부는 어디일까?
또한 웅진도독부는 백제땅이 아닌 중국의 요서지방으로 철수하였을까?
24만호에 인구가 620만이라면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다.
한가구당 5명을 기준으로 한다하더라도 24만호면 120만에 불과한데 620만은 어디서 나온 수치일까?
소정방이가 계산을 잘 못한 것일까?
통일 신라인구가 300만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620만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 만일 도독별 24만호라고 가정해본다면 120만의 5배이니 비슷한 수치에 달한다.
이러한 의문에 답을 주는 것이 중국역사에 나온다.
중국 南齊書에 의하면 백제 동성왕은 ‘面中왕 姐瑾(저근)을 都漢王으로, 八中候 餘古를 阿錯王(아착왕)으로, 建威장군 餘歷을 邁盧(매로)왕으로 廣武(광무)장군 餘固를 弗斯侯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아니라 중국 요서에 진출한 백제군이 위기에 처하자 대륙에 장군을 파견하여 그 전쟁에서 이긴 沙法名을 征虜將軍 邁羅王(매라왕)으로, 贊首流(찬수류)를 辟中王으로 삼고 解禮昆(해례곤)을 弗中侯로 木干那(목간나)를 面中侯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왕을 임명하고 제후로 봉한다는 것이 이상할지 모르나 남제서에 따른면 백제는 왕과 제후를 지방에 파견한 관리로서 임기는 5년이었다.
그 외 중국 梁書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으며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하였며, 叛波(반파), 卓(탁), 前羅, 多羅 등 수많은 소국을 거느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 지명이 모두 중국 대륙에 산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백제 부흥군의 장군인 흑치상지장군은 동남아(필리핀으로 추정) 담로출신인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은 물론 동남아까지 진출한 국가였던 셈이다.
인구 620만 이라는 수치는 이들의 지역을 아우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웅진, 마한외 3개 도독부는 중국대륙에 있는 것이다.
또한 당나라가 백제부흥운동이 본격화되자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파견한 군사가 나당연합군의 13만보다 더 많은 군을 파견하였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아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내 곳곳의 백제 부흥운동이 매우 치열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백제라는 나라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나약한 백제, 한반도 한 모퉁이에 위치한 소국 백제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음이 식민사학이나 사대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平濟塔'에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 흑치상지는 이가 검은 사람들이 사는곳(필리핀?)에서 오랜 세월 동안 거주하여 흑치라는 성을 받은 것으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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