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 새겨 보는 우리역사, 우리문화

붉은 악마와 치우천황

둥지방 2015. 3. 9. 14:06

붉은 악마와 치우천황

 

 

 대-한 민국 짜잔 짠~ ‘붉은 악마’라 불리는 우리의 응원단 구호이다.

2004년 월드컵때부터 등장하여 전 세계인들이 놀라게 한 이 ‘붉은 악마’의 유래가 궁금하였는데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우선 도깨비 같이 그려진 ‘붉은 악마’의 형상이 도깨비가 아니라 ‘蚩尤氏’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란다. 그동안 치우씨는 아주 포악하고 무서운 존재로서 중국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던 신화적인 인물이었기에 무서운 악마나 괴물같이 형상화하였고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도깨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옛 건물에는 잡귀가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끔 벽돌이나 기와에 도깨비 형상을 새기거나 그리곤 하였는데 이것이 치우씨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치우씨가 누구인가?

그는 4700여년전 동북아 대륙을 지배며 중국 漢族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며 한족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배달조선의 천황으로 병법의 鼻祖요 武神의 원조이자 軍神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재질인 구리와 철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어 중원대륙으로 진출하여 한족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청동기, 철기문화를 중국대륙으로 전파한 문명의 전수자이기도 하다.

중국의 始祖라는 황제(이름:軒轅)는 10년동안 73차례 치우천황과 맞섰으나 소위 涿鹿전투에서 패하여 치우천황의 신하국으로 되고 만다.

중국의 시조로 떠받드는 헌원의 패배는 곧 중국 한족의 치욕적인 역사인지라 중화주의가 한창 고조되던 한나라(실제적으로 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역사는 한나라가 처음이다.)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 맞추고자 사마천은 사기의 첫머리부터 탁록전투에서 치우천황이 패배한 것으로 왜곡하였다. 소위 “蚩尤作亂 擒殺蚩尤”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기록 이전에는 헌원이 치우를 죽인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치우를 병법의 비조나 군신으로 떠받드는 기록이 더 많다는 것이다.

사마천 자신이 쓴 사기의 封山書에는 진시황이 치우천황을 兵主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한고조 유방도 豊沛에서 병사를 일으킬 때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포박자(抱朴子)’에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주나라혁명의 공신인 강태공은 제나라왕으로 봉해진 후 치우를 병주의 신으로 제사를 지냈다한다.

사마천의 말대로 헌원에게 패하고 죽임을 당했다면 진시황이나 유방 강태공이 제사를 지낼 이유가 있을까?

이처럼 치우천황은 수천년동안 동방의 배달족은 물론 서방 한족에까지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었음을 알수 있다.

이제 중국은 한 술 더 떠서 헌원 황제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떠들더니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1980년 이후 염제(이 역시 배달조선의 천황이다.)와 그리고 1990년대이후는 치우를 포함하여 소위 中華三祖라고 하며 곳곳에 사당을 짓는 등 그들을 모시고 국가적인 제례행사를 치루고 있다.

사마천이 한족의 철천지 원수같이 생각하며 역사적으로나마 사형을 시켰던 이민족 천황을 자신들의 시조로 둔갑시켜 받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금세기에 들어서야 치우천황이 재조명되고 있는 셈인데 그것이 도깨비 모습의 ‘붉은 악마’라는 왜곡된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어 유감이다.

‘붉은 악마’가 아니라 ‘치우 천황’으로 바꿔야 되지않을까?

그리고 당당히 우리의 역사속으로 모셔와야 되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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