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그린벨트 성저십리(城底十里)
오늘날 우리의 산림이 열대림 못지않게 숲이 우거진 것은 그린벨트와 ‘入山禁止’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 제도 때문에 재산권 행사를 못하여 피해를 본 사람도 많지만 어쨌든 녹지보호와 보존측면에서 세계에서도 유래없는 성공적인 제도였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한양성 4대문을 기점으로 한 십리까지의 외곽지역을 城底十里라하여 오늘날의 그린벨트가있었다.
동쪽으로는 興仁門에서 중량포까지, 서쪽은 敦義門에서 마포 망원정까지, 남쪽은 崇禮門에서 용산 한강변까지, 북쪽은 肅靖門에서 북한산 인수봉아래까지이다. 그 면적은 4대문안보다 넓지만 인구는 성안주민의 1/10정도였다.
성저십리내에서는 주택건축은 물론 나무(특히 소나무)를 베거나 풀조차 태우는 등의 산림훼손을 금지하였고, 묘지도 못쓰게 하였다. 마음대로 입산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제도는 물론 都城내 주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특히 왕실 및 고관대작들의 사냥터를 보전코자 한 것이었기에 성저의 주민들에게는 고통과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현동 미나리, 이태원 호박 수박, 뚝섬 배추 등의 특용작물을 성안주민들에게 공급하는 소위 근교농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되 새겨 보는 우리역사, 우리문화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랑공주, 호동왕자 얘기2 (0) | 2015.03.25 |
---|---|
낙랑공주, 호동왕자 얘기(1) (0) | 2015.03.25 |
첨단 과학이 입증한 에밀레종 (0) | 2015.03.25 |
또 다른 물시계 玉漏 (0) | 2015.03.25 |
물시계, 해시계는 세종때? (0) | 2015.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