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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륙백제에 부연하여

둥지방 2016. 5. 29. 18:15
 

이글은 아래에 포스팅된 임승국교수의 '한반도백제와 중원대륙백제 (1) : 조국 백제의 재인식을 향하여'라는 논문에 부연하여 Mimesis님의 댓글에 단 response이지만 드래그의 편의를 위하여 본문으로 재 포스팅합니다.

 

-대륙백제에 부연하여-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모화주의내지는 사대주의에 브레인워싱되면서 지나의 정사는 오류가 없을 것이라는 착시같은 것에 빠져있지요. 그래서 청의 건륭제도 이러한 지나 중심적 역사의 집필 태도를 진한의 편두의 예를 들며 강력히 비판했던 것입니다.

청은 지나족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고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지나를 끌어 올렸던 우리와 같은 혈통의 말갈-여진계 퉁구스입니다. 즉 인종적으로 우리와 같은 민족이고 역사적으로도 공동운명체인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식적 역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 백제의 강역에 대해서 기술합니다.

'백제의 수도는 대륙과 반도에 2개가 있는데 대륙에 있는 수도는 거발성이라 하고 반도에 있는 수도는 고마라고 한다.' 즉 백제는 로마처럼 황해를 지중해처럼 이용하며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를 모두 통치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중국에서 어라하가 거처하던 주 수도는 거발성이고 소위 부속 수도로서 고마 즉 공주를 두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개로왕이후 고구려등의 침공등으로 국력이 쇠잔해지자 반도 백제에 보다 비중을 두고 어라하도 반도백제에 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흠정원류고에서 무령왕때부터라고 합니다.

고조선시대부터 백제멸망전까지는 실제 지나 동해안을 지나인들이 완벽하게 통치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백제멸망이후에 명대까지도 백제의 유민이라는 자들이 지나의 조정에 자신들을 백제의 후예라고 지칭하며 공문서를 올리는 경우는 지나의 원사나 명사에 자주 등장합니다.

즉 백제 멸망전 까지는 서해의 지나쪽 해안인 산동이남과 산동이북을 통하고 요동을 거쳐 한국서해안으로 한국과 지나동해안지역이 좁은 형태이지만 연결되었고 백제 멸망이후부터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백제의 유민들의 정치적 실권이 지나동해안에 점선 형태로 분포했다는 것입니다.

후에 고구려가 요동을 장악하며 동백제와 서백제를 연결해 주던 이 랑은 끊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한민족이 이 회랑에 대한 주도권을 놓친것은 아니지요.(장수왕 때 백제 수도를 공격했다는 것은 현재 반도의 한강 유역의 한성이 아니라 산동반도 쪽 황하강 유역의 한성-거발성-지역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중국 산동 황하이남 숭산 인근지역에도 백제라는 지명이 남아있으며 황하 이북으로는 한성 황하이남에 웅진, 주류성 등 우리 역사서의 기록과 한자도 똑같은 지명들이 늘비합니다.)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했다…(한)강 따라 둑을 쌓아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숭산과 하남과 백제라는 지명 모두 지나에 있습니다. 실제로 반도 백제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지명이 지나에서는 황하남북 양안을 거쳐 부지기수로 발견됩니다.

즉 한국서해안에서 요동 중국동해안으로 이어지는 루트에 대해 고조선이래 우리민족이 이 지역에 대한이니셔티브를 한번도 놓쳐 본 적은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루트를 통해서(고구려가 통제하기 전인 고대에)산동과 요동에 있던 대륙백제가 한반도에 까지 남하하여 반도백제를 세운 것이기도 합니다. 장보고의 신라방이 융성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동이족의 역사적 기반을 근거로한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삼국사기에 의문투성이의 기록이 아주 많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중 하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발견됩니다. 즉 김춘추를 당나라 황제가 백제공격시에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을 합니다. 그런데 우이도가 어디나 하면 옛 중국역사 지명 상 .. 지금 영토 기준으로 봐도 산동반도입니다.

전통적인 사대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당나라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들이 바다 건너 한반도에 오는데 왜 뜬금없이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김춘추를 임명 합니까?

문무왕 11년에 당나라가 평양을 공격하는 차에 김유신은 양하도 총관의 직함으로 군량을 운반합니다. 그런데.. 양하도가 어디냐 하면.. 황하 남북을 의미하는 것이고 양하도 총관이란 그 황하남북의 총관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라크 공격하러 가는 사람한테 이라크 방면 군 통수권자 뭐 이런식으로 쓰는게 당연한데 이라크 공격하러 가는 사람한테 엉뚱한 나라를 공격하는 지휘관의 직함을 내릴 수 는 없는거지요.

더우기 백제 멸망시의 인구가 고구려보다 더 많은 76만호 전성기에는 200만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구당 아무리 미니멈으로 4인을 적용해도 현재 전라도 인구보다도 많은 300만 전성기에는 800만 그리고 당시의 대가족제도의 특성을 감안하여 좀 더 호구수를 확장하면 호구당 인구는 더 늘어 날 수 있습니다. 이는 대륙백제설을 비정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수치입니다.

대왕세종에서도 나오지만 조선초의 인구가 650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1000년전인 고대에 그것도 전통적인 사관에 따라 충청도와 전라도에 국한되는 백제가 어찌 300만이라는 인구를 가질 수 있습니까 지금도 전라도에는 300만이 못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의문점에 대해서 지금까지 소위 신라사관에 절어 기록의 오류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시키거나 지나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 쪽으로 지레 해석을 해왔습니다. 또 역사적 전통상 지나쪽의 고고학적 발굴은 언감생심 꿈에도 꿀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수천년간의 역사적 왜곡이 자행될 개연성은 높습니다.

그리고 서지학적 기록에만 의존하던 고대의 역사방법론하에서는 그렇게 한번 정사의 범주안으로 편입된 역사의 기록들은 비판없이 당연히 추수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그게 신라인들이 스스로 굽히고 들어간 지나사인 바에야 어찌 감히 정정을 시도하겠습니까.

지나의 역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조차 대륙백제설은 엄연히 기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사관에 쩌들은 과거의 김부식류의 사학자나 그 전통을 이어받은 현재의 강단사학계는 짐짓 지나족들이 청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모르는체 했던 것이지요. 청의 흠정만주원류고는 지나의 정식 역사서입니다.

 

요동을 지배 했다는 고구려 역사를 가지고 왈가 왈부 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라지고 축소된 백제의 역사또한 그 비중이 고구려사 못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축소된 부분이 바로 지나의 역사책에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자기나라 역사책까지는 없애고 불태우지는 못하는 까닭에 그 왜곡의 일부분이 드러나고 있는게지요.

위에서 말한 흠정만주원류고를 비롯한 지나역사서가 기술하고 있는 백제사의 일부분을 더 부연하오니 참고바랍니다.

<중국 요서지역을 지배한 백제>
백제가 요서(遼西)를 지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97권 백제전에 실려 있습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백제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백제의 소치(所治)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소치(所治)’라는 표현입니다.

‘치(治)’는 고대사회에서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군치(郡治) 현치(縣治)일 경우에는 지방장관이 거주하는 군청, 현청 소재지를 뜻하고 국가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 즉 국도를 의미했습니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합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점’이라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라 때 금주, 영원, 광녕 일대라 추정했습니다.

그러면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국도를 정했다가 한반도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흠정만주원류고’는 그 시기를 양나라 천감(天監)시대로 봅니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한반도로 천도해 왔다는 것이지요.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 백제열전에 있습니다.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이 기록이 없지는 않습니다.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합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熊)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기 때문에 공주 또는 웅진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흠정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晉平城)이라고 적시합니다.

지나의 역사학자 허광웨(何光岳)는 '동이원류사’에서 백제의 ‘제(濟)’를 산둥성의 제수(濟水)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즉 남쪽으로 내려온 부여족은 부락이 점차 늘어나자 옛 산둥성 ‘제수’로부터 유래한 그 뿌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백제의 발상지를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한반도의 하남 위례성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백제라는 나라 이름에 대한 명확한 유래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발상지가 지금의 산둥성 추현의 부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백제 국명의 유래도 제수와 연관지어 찾아야 옳다는 의미에서 타당한 학설입니다.

지금도 제수는 산둥성을 가로질러 흐릅니다. 현재 산둥성의 성 소재지 지난(濟南)시는 제수의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제수는 옛 사독(四瀆), 즉 강(江), 하(河), 회(淮), 제(濟) 등 사대수(四大水) 중의 하나로 허난성현 서쪽 왕옥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산둥성으로 들어갑니다. 그 하류는 동북쪽으로 흘러 황하와 함께 바다로 들어갑니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사마천의 사기의 구려의 구이중의 하나)이며 마한족이다’라 하며 산동성일대가 그들의 본향임을 말해줍니다. 아울러 마한의 강역이 고대에는 지나의 산동지역을 아우르는 것임을 우회적으로 입증하기도 하지요.

즉 '내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서경’ 우공편).' 산둥성 내산(萊山) 밑에 살아서 그들을 내이(萊夷)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와 옌타이 일대입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때 편찬된 책입니다. 흠정이란 황제의 저술 또는 황제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저술을 뜻하지요. 청나라 건륭 43년에 아계(阿桂)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이 책은 부족, 강역, 산천(山川), 국속(國俗) 네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간행된 지나의 공식적인 역사지리서입니다.

당시 조선은 친명배청(親明排淸)정책을 견지하는 바람에 조선과 청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청나라가 한국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미화했을 리 만무하지요. 단지 자신들의 터전인 만주의 고대사 원류를 추적하다보니 우리 민족사의 한 축인 백제사와 만나게 되고 그것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기술한 것입니다.

‘만주원류고’에 보이는 백제는 후진적이고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강토는 광대하고, 인구는 많고, 역사는 깊고, 문화는 우수하고, 국력은 강대한 대제국이었다.'라고 기술합니다.



 

출처 : 슈뢰딩거의 고양이
글쓴이 : 레이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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