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아닌 사람이 쓴 글이라 시대적 착오가 있을 수있다는것을 이해해 주시고 읽어주세요.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정리해서 역사로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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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자 모음은 24자입니다.
한글이 되기 전에 이름은 훈민정음이고, 28자로 되어있지요.
그리고 훈민정음은 38자의 자모음인 가림토를 모방했다고 했습니다.
한글이 세종대왕이 창제한 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대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 일겁니다.
소리는 필요에 의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글 24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반도에 갇혀있는 역사를 배우고 살아온 사람들이지요.
더 이상의 표현이 없어도 우리끼리는 의사소통이 충분하니까요.
하여 훈민정음의 4자까지도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 줄였습니다.
이는 활동무대가 줄어들었다는 소리가 되는 겁니다.
먼 곳(외국)과 빈번한 교류가 있다면 그들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필요했겠죠.
말해서 우물 안에 갇혀 살겠다는 소리가 됩니다.
28자의 소리만 해도 중국, 몽골, 일본 등의 소리를 낼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조선은 10여자의 소리를 제외시키고 28자를 사용해왔던 거지요.
하지만, 단군시대에는 더 많은 소리색이 필요했습니다.
유럽 쪽의 소리, 동남아의 소리까지, 소통하고 배워야했기에 발음색이 달라야했던 겁니다.
전 세계의 물류배달을 책임 맡았으니 가는 곳마다 다른 음색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하여 38자의 자모음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거지요.
문제는 왜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지 못했는가 입니다.
한단고기라는 책에는 3세 단군 갸륵께서 글자를 만들어 공포를 했다는데 전해져 내려오지 않으니 답답한거지요.
먼 훗날 역시 후 조선에서 훈민정음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역사의 맥을 찾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미궁의 사건입니다.
다행히 배제대학교 서반아어과 손성태 교수가 실마리를 찾아 주었군요.
멕시코 박물관에 우리조상들이 이동해온 기록이 스페인글자로 적혀있는데 한글의 소리더라는 겁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기록하고 스페인 사람이 모르는 멕시코역사가 한글 소리라는 겁니다.
그곳 멕시코까지 넘어가는 과정이 상세히 스페인어로 기록되어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직도 모른답니다.
환웅말기쯤 기후 변화가 있어 이동을 합니다.
이동을 하면서 치우환웅이 천산에서 만주 쪽으로 들어와 선조들이 한 일을 합니다.
그때 중국 땅에 있던 황제 헌원이 화가 난겁니다.
실제는 신농씨가 먼저 화를 내고 반란을 꿈꾸었지만 힘이 없어 황제헌원을 꼬드겨 반란을 일으켰다더군요.
아마 혈통으로 봐서 자신이 환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먼 곳에서 데려다 앉혀놓았으니 화가 날만도 한거죠.
하여 반란을 시도해 9번지고 마지막에 이겼다 잖아요.
헌데 정통성에 문제가 생겨 얼마 못해먹고 다시 6국시대로 접어들었지요.
이때 아마 단군이 추대된 모양이더라고요.
누군가 소금을 가져오고, 생산된 곡물과 가죽, 그리고 털을 유럽 쪽으로 보내야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전부 편하고자하는데 어쩔 수없이 桓의 직영지역을 관리하던 막내인 韓이 이 일을 맡게 되는 거지요.
하여 朝鮮이라하고 檀君이라 한거지요.
물류 수송하다보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소통이 안 되잖아요.
현지 교환만을 담당하던 韓이니 외지의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가 직접 외지로 나가 교환을 하려니 어려움이 많았을 겁니다.
해서 어찌어찌 3세 檀君까지 내려오다 보니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거지요.
해서 후세를 위해 글자를 만들어 가르치게 된 거지요.
사용하기 위한 글자로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남들의 소리를 듣고 그걸 녹도문자로 옮기는 작업에 필요한 글자지요.
말과 말 사이의 통역 글자라고 할까요?
상대와의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나라의 소리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은 자모음이 줄어들면서 발음이 어설프지만 당시에는 아마 그 나라와 비슷한 소리를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헌데 유럽에 전쟁하러 갔다 온 사람들이 돌아왔는데 자리를 잡아준 곳이 산시지역을 중심으로 잡아 주기는 했는데 그 지역이 너무도 척박하여 먹거리가 없게 되니 물류 수송하는 걸 탐했겠죠.
하여 잦은 다툼에 배를 건조해 동남아 쪽이나 남부는 배로 수송을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배를 만드는 것을 造船業이라고 하죠? 바로 조선시대에 배를 만들었기에 조선업이라고 한것으로 추정됩니다.
단군 말기에는 또 기후변화가 있었는지, 싸우기 싫었는지, 또 이동을 합니다.
거기에 秦나라는 소금이 자체생산이 되어 굳이 중앙인 朝鮮에 기댈 처지가 아니었거든요.
이미 秦은 유럽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니 직접 교역을 했는지도 모르고요.
아메리카대륙에 넘어갔다 돌아온 두 사람이 있는데 한사람은 중국 쪽으로 갔고, 한사람은 만주에서 한반도 쪽으로 내려온 모양이더라고요.
그들이 이동을 권유하여 마한과 진한은 이동을 하고, 번한만 농사가 주 사업이었으니 그대로 남았다가 漢의 침공을 받게 된 겁니다.
漢은 桓雄시대에 아동을 할 때 일부가 남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되고, 외부와 단절 되어 오래 지났으니, 완전히 남이된거지요
하여 秦의 통일 시대에 본 것이 있으니,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든 사람이 유방 아닙니까?
번한의 왕족들이 패하여 도망친 곳이 바로 한반도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곳이 청주이기에, 이곳에 와서도 지역을 청주라고 하고 본향을 그리 쓰고 있지요.
허겁지겁 도망을 왔는지 아무것도 돈 될 만한 걸 가져온 게 없네요.
와서 부여의 동병철검만 얻어다 놓은걸 보면 수복하겠다는 의지 인 것 같은데 후손들도 그러한지???
문제는 가림토 글을 배운 사람들이 일반 목동들이 아니거든요.
귀족계급들이 배웠는데 그들이 모두 떠나버렸으니 남아있을리가 없지요.
또 한웅이나 단군시절처럼 물류수송을 해야 소리가 필요한 것인데 漢나라가 침공을 하여 도망 온 처지이니 소리글은 아무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번한이 三韓의 중심이라고 얘기들도 하는데 중심이었다면 가림토 글은 존재해야하는 겁니다.
가림토 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외부로 교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장롱 속에 쳐박아 둔 글자가 전해질 수가 있었던 거고요.
오히려 최근에 아메리카 대륙 중심부근에서 녹도문자와 가림토 글을 발견했다는 윤00씨의 보고가 있었지요.
여기에서도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 기록만 존재할 뿐이죠.
秦나라가 통일을 하면서 또 모든 책을 불살랐잖아요.
불만 사른 것이 아니라 지역 지역에서 쓰던 글자도 모두 없애버린 겁니다.
그리곤 오늘날 전해져오는 漢字로 정립을 한거지요.
漢子이기전에 녹도문자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 秦나라는 녹도문자를 썼을 겁니다.
당시에는 많은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았다가 후에 漢나라가 통일을 하면서 글자 수가 늘어난거지요.
지금처럼 많은 글자가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해요.
글자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모든 책들을 새로 만들었기에 漢子만 전해지고, 나머지는 어느 집 반다지에 보자기에 싸서 보관을 했을지도 모르지요.
그중 하나가 가림토 글입니다.
이후 부여, 고구려가 탄생되었지만 가림토글을 배울 필요가 없던 지방의 장수였기에 글자가 있는 줄도 모른겁나다.
백제는 농경과 상업을 이어오던 사람들이지만 주 거래가 대륙이었으니 한자문화를 받아들여야했고, 신라는 秦이라는 깃발을 들고 이 땅에 들어왔다고 하니(최원용씨의 대백제 논문 중) 秦의 패장들일 가능성이 크기에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글자를 외면할 이유가 없어 가림토나 한글의 확산을 달가와 하지 않을 처지인거죠. (BC57년 건국은 발해만 부근 긍성에서인 모양인데 이즘 또 경주월성으로 만들고 있군요. 남이 역사왜곡을 해주고, 스스로도 역사왜곡을 해야만 하는 나라가 나라입니까?)
있다고 해도 대륙의 힘에 눌려 잘 사용을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오히려 영류왕은 대륙 쪽 문물을 받아들임으로 이 땅에도 한자문화만이 옳은 것으로 전해져오게 되었다가 고려, 발해를 지나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세종대왕이 대륙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해 글자를 만들려고 하다 가림토를 보게 되고, 역사의 오래됨을 은연중 나타내기 위해 가림토글을 다시 사용하게 되는데 28자 외에는 소리를 낼 필요가 없으니 10자를 사장시킨 거지요.
세종대왕의 한글 작업은 내세울만한 일이나 그전에 가림토 글이 있었고, 사용했다는 것 또한 역사입니다.
비록 힘이 없어 반도가 된 도화도로 쫒겨 내려와 살지만 과거에는 전 지구를 종횡무진하며 돌아다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後朝鮮은 활동범위가 좁았다고 해도 동북아 지역과의 소통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8자면 중국, 몽골, 일본등과는 소통이 가능한 소리이니까요.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이후 대한민국은 이 28자마저도 4자를 줄였지요.
반도내에서는 소통이 가능한 소리이나 외부의 소리는 전혀 기록을 할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자랑스럽게 한글이 우수한 과학적인 글이고, 우주 과학을 활용한 글자라고 하면서도 반도내에 가두어 두기위한 일본의 술수를 따르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한글의 위용이 빛을 발하죠?
컴퓨터작업을 할 때 한글만큼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글자가 없잖아요.
38자 가림토글이라면 아마 지상의 모든 발음을 한글로 기록할 수가 있을 겁니다.
본래 그들의 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만든 글자라 그런 겁니다.
사람의 소리는 물론 자연의 소리까지 글자로 표현을 하고 소리를 낸거죠.
소리는 내되 의미는 알 수가 없는 겁니다.
하여 의미는 다른 글자로 표현을 했기에 漢字를眞書라고 했던 겁니다.
한글만을 가지고 의미를 나타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병용하는 것이 맞는 겁니다.
알파벳 역시도 소리글자지요.
컴퓨터 발명이 알파벳 문명에서 나왔다면 우리 가림토 글은 활용도면에서 월등히 우수한 겁니다.
자판만 38자로 확장한다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컴퓨터에 옮길 수가 있고, 활용할 수가 있는겁니다.
이즘 통역이 없어도 핸드폰 통역을 한다고 하더군요.
이런데 사용하면 한글(가림토)이 최적의 글자가되니 과거 우리 조상님들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경우가 되는 거지요.
독도는 우리 땅! 해봐야 통일 신라이후인 1000여년 밖에 안 된 나라로 알려진 현실에서 씨도 안 먹히는 일이죠.
5000여 년 전 사람이 만든 글자가 있는 역사를 가진 민족이니 현존 지구상 가장 위대한 민족인거죠.
과학적인 글자를 만들 정도의 지식이 있으니 그 이전의 역사가 궁금해질 겁니다.
1만 년 전에 한님이 세상을 열었다는 얘기가 자랑스러워 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당시에 일본해가 어데 있었을까요?
한글에도 역사가 숨어있는데 檀君은 실체적 인물이었다????
한분이 4000여년을 통치할 수있나요?
실체가 있는데 기록은 없습니다.
그동안 단군할아버지가 조상님이라고 전해지는 한분이니 4000년을 사신 하느님이라고 할건가요?
환단고기에는 47분이 4000여년을 통치했다고 되어있습니다.
또 유기100권의 존재는 없습니다.
없어서 없는건지 있으면서 없는건지 불명확하지만, 유기100권속에는 한님시대로부터 한웅님시대, 단군사대로 해서 고구려까지 100분의 기록이라고 한다더군요.
이 기록이 환단고기 속에 들어있지요.
삼국사기속에 없는 기록들이 존재하는데도 부정만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위서임을 조목조목 나열한 분이 있더군요.
일본이 저술한 “서기”는 과학적이라 진서라고하면서...
이스라엘 역사는 구전을 역사화 했다고 들었네요.
그리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연구를 하여 많은 부분을 찾아 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 사학자님들은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도 부정, 실체적 존재로 부상한 환단고기 마저도 위서로 단정짓고 일본이 만들어준 역사만이 진실이라고 꿰맞춰 비난하는 연구들만 하고있으니 어느나라 역사학자인지 궁금할 뿐입니다.
또 역사를 흐리기위한 작업인지 번한이 삼한의 중심이라고 하는분들 역시 중국에서 월급을 받았으면 싶군요.
馬는 12간지중의 天입니다.
번한(변한)은 우측에 있던 韓 이고요.
지금도 사용하는 말에 변방하면 가에 위치한 지역이 됩니다.
배달이 물류 이동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듯 같은 원리죠.
진한은 동쪽인데 마고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이고, 이 땅에 본래 살던 사람들인거죠.
진실, 진짜, 진심...
한자로는 다르게 쓰지만 소리는 같이 난다는 건 바로 파생어이기 때문입니다.
桓은
문자보다는 말이 먼저 태어났다.
하여 서로 소통하는 수단이된거다.
하지만 지역사회를 통치하는 통치자로써는 문자가 점차 필요하게된다.
한단고기를 역사서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하는 논쟁에 종교가 끼어들기에 역사서가 아니라는 사학자들이 일부있다.
권력을 장악한 사학자들이기에 그 힘은 일부이지만 상상을 초월한다.
그게 오늘날 우리 사학계의 현실이다.
이스리엘은 구전의 역사를 기록으로 옮기면서 종교적 신념과 통치적 이념을 전수해왔다.
허나 한국은 구전의 역사는 신화였고, 실증된 유물은 타국이 통치하는 지역에 있기에 인정할 수없고, 한단고기 역시 종교가 소유하고 있기에 역사로써는 부적절하다는 평이다.
하여 한국의 뿌리 역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해 반도내에서 허리한번 펴지 못한채 사대와 굴욕을 참고 살아야하는 나라가 되버렷다.
한글 역시도 가림토 문자(단군시절)가 아니라 세종대왕(조선1592년)이 창제하신 순수 우리말이기에 전용을 해야한다는 학자님들의 얘기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일반 백성과 통치자는 다른 위상을 갖고 살았던 지난날이다.
하여 글 자체도 다르게 사용해야만 우월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게 오늘날 까지도 이어져왔지 않은가?
공부좀 했다는 사람 치고 영어단어 안 섞어쓰는 사람있는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외국인이 되 버린 필자는 방송도 소식(뉴스)도 대화도 어렵게 된 오늘날이다.
한글 전용인데 왜 내가 외국인이 되 버려야하는가?
잘난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러러니 하면서 산다.
桓의 의미
桓(푯말 환)이라고 알려져있다.
木+一+曰+一이다.
단군을 상징하는 솟대도 푯말이다.
길 어귀 나무에 서낭나무가 있어 줄을 늘이고 자기가 가지고있는 귀한것을 꿰어놓는것도 푯말에 해당한다.
하면 왜 이런 푯말이 만들어 졌을까?
옛날, 아주 오랜 옛날
드넓은 평지에 길을 잃을까 하여 만들어 놓은 표시다.
중앙 아시아 지역을 포함하여 몽고지역에 가면 서낭나무가 있고 주변 주민들이 염원을 담은 부적들이 걸려있는걸 본다고한다.
우리 나라도 얼마전까지 마을어귀에 서낭나무가 있고 정월 보름이면 제를 지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진 유물이지만...
왜? 조상들이 이런 표시를 해 놓았을까?
언제부터 일까?
桓은 하늘 一 이 자손인 一 에게 나무를 통하여 말하는 글자다.
즉 자연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라는 의미도 닮겨있다.
옛 조상님을 환인, 환웅이라고 칭하는것은 바로 하늘과 상통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보살피셨기에 그리 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보살피시는 분, 그분들이 조상님이시였다.
따라서 가시는 곳에는 푯말을 두어 경계로 삼았지 않나 생각된다.
一은 처음이고 하나이다.
曰은 가로왈, 즉 말을 하다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태양을 표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위 一 은 하늘의 모양이고, 아래에 태양이 있고, 또 아래에 一 이 있으니 하늘과 태양아래 유일한 분이라는 뜻도 되고, 하늘 가라사대 땅이니 하늘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성현이라고 해도 된다.
여기에 나무인 木이 옆에 있으니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셨다고 볼수도 있고, 가는곳마다 푯말을 꽂아 놓았으니 경계를 만드시는분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木은 성현을 뜻하는 글자이기도 하고, 오행에서 동쪽을 가리키는 의미도 있다.
하면 늘 성현들을 데리고 다니는 분 이라고 해석해도 가능할것이다.
韓은 一이 빠진 자치생활이지만 환은 그 자체가 一이다.
때문에 桓國(사실 이때는 나라라는 말을 하는것은 불경한것이다)에서 지방에 韓國을 두어 스스로 다스리도록 했던 것이다.
12개의 韓國이 스스로 서로 도와 가면서 생활할 수 있도록 위에서 보살펴 주기만 했던 분들이 桓人들이시다.
몽고의 징기스칸은 스스로 칸(桓)이라고 했다.
신라의 호칭도 "간(竿)"이였다.
그들도 같은 종족이기에 조상들의 뒤를 이어 그리 했던거다.
얍삽한 조선만 스스로를 낮춰 韓이라 하고 지나(중국:차이나:辰韓:晉)인들에게 빌붙어 살다가 일본에 당한거다.
지나(중국: 차이나: 辰韓:晉)도 황제요, 일본도 황제인데 조선만 王이다
글자의 재미는 여기에도 있다.
皇은 임금 황자다.
풀어보면 白+王, 白은 흰백, 맞 백에 아래에 임금왕
伯(맞이 백)이니 단군시대 초기에는 황제라고할때 맞이백자를 쓴 모양이다.
黃帝가 누구인가?
치우환웅과 다퉈 9번지고 열번째 이겨 왕이된 사람 아닌가?
이때부터 중국땅에는 皇帝라 불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에는 大王이라고하다 소리가 같으니 王위에 伯자를 올려썼다고 자전에 나와있다.
본래의 황은 스스로 자 自+ 임금 왕王이다.
하늘이 내린 임금의 자리가 아닌 스스로 임금이 된자를 말하는거다.
황제가 지위가 높아 된자리가 아니라 무력으로 강탈해서 생긴 자리인것이다.
王은 一이 세개가 겹친 곳을 하나가 받처주는 형상이다.
이는 한인 한웅 단군을 받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天地를 공평하게 받치고있는 형상이라는 거다.
정통을 이어받은 통치자는 스스로 皇이 될 필요가 없다.
무력으로 다툴 이유도 없고....
동북 공정에서 억압으로 빼앗으려고 하지만 종가의 자리는 이렇게 약한듯 없는듯 이어져온것이다.
이제 韓을 국호로 쓸 이유가 없다.
본래의 桓으로 돌아가자
환은 한과 음이 같은 거다.
조선이후 삼한(마韓 진韓 변韓)이 국가 였던게 아니라 지방자치국이라고하면 또 돈벌이 하는 학자들은 반발 할거다.
세상 모두를 관할하는 통치자, 즉 하늘의 자손이 굳이 어느 일정 부분만 관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웅시대에 12개 한국이 있었고, 단군조선에서는 삼한이 있었던 거다.
환이라는 소리는 환하다에서 옮겨온 듯싶다.
하여 煥불꽃 환이란 글자가 만들어 졌다. 감히 桓人, 桓雄을 일컽는 단어를 사용할 수없으니 그리 했을 것이다.
왕이 이름을 지을 때는 세상에 없는 글자를 만들어 썼고, 이 글자는 누구도 사용할 수없는 글자가되는 것이 통례다.
環(고리환)은 환시대의 생활상이다.
각 부족끼리 고리로 연결하듯 엮여 외세와 대적했다는 얘기다.
고리처럼 서로 연결해 하나의 힘을 발휘했으니 이 시대의 생활상을 나타낸 글자일 것이다.
歡(기뻐할 환)은 목초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관리를 하고 서로 다투지 않았으니 당연히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換(바꿀 환)은 초지를 서로 교환해가며 살았다하고, 서로 남는 물건을 교환했다고하니 아마 경제생활 상인듯 싶다.
幻(변할 환)은 한자리에 있지 않고, 서로 목초지를 순환하다 보니 환상적인 풍경들을 보게되어 나온 글자같다.
宦(벼슬 환)은 한님 한웅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일컬은 말일 것이다.
還(돌아올 환)은 목초지를 순환하다보면 몇년 후에는 제자리에 돌아오기에 만들어진 글자로 보인다.
丸(알 환)은 아홉 부족이 하나로 뭉쳐 마치 하나와 같다해서 만들어진 글자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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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 소리에 다양한 내용이 표현된 것이 桓字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하면 한자는 상형문자로 가르치고 알고 있지만 최초의 글자가 탄생하게된 배경은 신에게 어떠한 사실을 고하고 그 뜻을 알려달라고하는 주술적 행위에서 바롯된 것이다.
하여 갑골문이라한다.
양의 뼈에 뜸을 떠 갈라지는 형상을 보고 하늘의 뜻을 읽고, 행했으니 그 행위가 바로 뜻이다.
중국이 3500년전 은나라의 갑골문을 보고 자기들 통치지역에서 나온 글자라 하여 한자의 기원을 정했었다.
하지만 만리장성밖 요하지역 홍산에서 발견된 갑골문은 5000여년전의 갑골문이다.
(현재는 대만에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고한다)
요하지역은 자기들이 역사로보나 전설로보나 대한민국의 조상인 환웅과 단군이 거주하시던 지역이다.
갑골에 갈라진 모양을 좀더 단순히 하여 녹도문자라고 한다.
사슴 뼈가 갈라진 글자라는 말이다.
이후 사람들이 글자로 사용하면서 단순해지고 또 복잡해졌다.
과거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桓字를 漢字라고 할 수있다.
맥이 끊어졌으니....
단군시대 역시도 환시대와 마찬가지로 유목이 생활의 주 근거였을 것이다.
벼를 재배하고, 채소를 재배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테니 유목에 의지하는 수 밖엔 별 도리가 없다.
헌데 중국의 침략을 받았다고 무너질 나라가 아니다
문제는 신대륙의 발견과 민족 대이동이 한나라의 침략의 구실이 된 것일것이다.
동쪽에 있는 신대륙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다.
바다건너 신대륙인 오늘날의 남북 아메리카지역이다.(배재대학교의 스페인어과 손성태교수 주장)
멕시코 역사와 유물속에서 발견된 조상들의 피의 흐름을 그는 보았다고했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아닌 우리와 피를 나누던 동족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다는것은 곧 문자의 단절이다.
요하의 서쪽과 남쪽에는 형제들이 살고 있었지만 거대한 조직이 형성되 유목 생활에 다툼이 생기니 양보를 하고 떠나간 것으로 판명된다.
당시의 종통은 막내승계원칙이었다는 어느 역사 학자의 말이다.
성인이되면 분가하여 새 생활을 해야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시절, 부모가 늙으니 막내는 내 보내지 않고 함께 지냈다는 거다.
실제 한(당?)과 흉노의 싸움에서 흉노의 세력이 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을 하는데 흉노가 동생이되고, 한(당?)이 형이되는 요상한 협상결과가 있었다.
이는 위 원칙에 입각한 협상이될것이다.
우리도 단군이 종통을 이어받은 이유가 정실이 아닌 후실인 웅녀가 나은 자식이니 단군은 막내일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당시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진 가계 문제에서도 역사의 흔적은 남아있게된다.
종가의 어른이 안 계신 동생집에서 명령을 내린다면 듣겟는가?
이미 어른은 신대륙을 향해 떠나신 후이니 자기들 농토를 순순히 내어줄 이유가 없다.
중국과 다툼이 일기 시작한 연대와 이주 연대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있음을 역사학자들은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도는?
명당이다.
명당이란 말은 외부 기운에의해 변하지 않고 온화한 지역이다.
때문에 전세계의 고인돌 유적의 절반 이상이 이 땅에 있다.
환시대, 단군시대의 고인돌이 있으니 그 유물을 지키고 제사를 올리는 사람이 살아야하는 지역이다.
당연히 문자가 만들어지지는 못했지만 보존은 해야만 하는 지역이다.
지역이 좁고 사용하는 문자가 많지 않으니 당연히 어휘가 많아질 수가 없었다.
단군이 떠나신 후, 해모수가 북부여를 열었지만 이미 백성이 없어 한나라에 밀리고, 동부여를 연 금와왕도 민심을 잡지못해 고구려의 탄생을 가져왔지만 문자를 만들 권한들이 없으니 어휘가 많이 늘어난 당나라의 문자를 역 수입해 오면서 桓字는 漢字로 굳어진 것이라 본다.
桓字가 중국 글자가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한 음절로 발음을 못한다는 거다.
소리와 글자는 자기들이 만들었으면 한글자에 한음절이라야한다.
우리는 한 음절로 발음을 하지만 그들은 발음을 할 수가 없다.
물론 일부 글자는 그들도 한 음절이다.
중국 대륙의 통치자는 이쪽인 만주에서 넘어간 소수라지만 그 땅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과 소통을 하려면 그들의 소리를 내야하기때문에 동화된 발음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방이 한중으로 들어가 한족을 이끌고 대륙을 통일 했지만 유방이나 한족은 분명 유목족이지만 한족은 넘어간지 오래된 사람들이라 이미 동화된 사람들이기에 소리나 정신에서는 이미 외인이된 사람들이다.
특이한 것이 마니산의 참성단이다.
한강 이북까지는 유목족의 활동근거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남쪽에 참성단을 쌓을무렵 누가 살고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다른 곳은 모두 원형제단이 위에있고, 방형제단이 아래에 위치하는데 이곳 참성단 만큼은 위치가 다르다.
이는 유목 족보다 더 위대한 분이나 세력이 이곳에 존재했었다고 볼 수가 있다.
아니면 웅녀의 무덤이 이곳에 존재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들은 양이니 음의 세상을 보는 곳이라하여 상징적 의미를 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桓으로 보는 역사와 문자는 결코 남의 것이 아님을 재차 말하고 싶어 글을 써 보았다.
한자 병기에 대해 말들도 많은데 지구의 종가집 종손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임에도 방치하고 남의 것이라하니 애처로운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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