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의 역사기행 13
해양 제국 대 백제
그사이 주몽성제께서 고구려를 창업한 지 15년에 이르렀을 때 동부여에서 숨어 살던 성제의 아드님이신 유리가 모친 예씨(芮氏)와 함께 찾아오자 성제께서는 유리를 태자로 삼으셨다.
앞서 성제께서는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 누차 말씀하셨다. 성제의 왕후 소서노(召西弩) 왕후는 두 왕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장래를 염려하여 경인년 3월(BCE 42)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패대(浿帶: 현 하북성 난하 일대)로 이주하였다. 그곳은 옛 단군조선 번한의 초대임금 치두남이 다스리던 12성 중의 하나인 백제라는 곳이었다.
“동생, 내가 배우기로는 소서노는 공주가 아니라 두 아들을 가진 과부로 배웠거든, 그 아들이 비류와 온조라 했는데.”
“흐흐 형님,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김부식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주몽이 부여 공주와 결혼했고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하면서도 소서노가 연타발의 딸이자 비류, 온조의 두 아들을 가진 과부로 헷갈리게 기록하였지요. 물론 전하는 말이라는 것을 전제하긴 했지만. 학계에서는 전하는 말을 정설로 믿어버린 것이 이처럼 왜곡되었습니다.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습니다.”
소서노 왕후는 나라를 개척한 지 10년 만에 남으로는 대수(帶水: 요하)에 이르고 동으로는 바다에 닿는 500리의 국토를 가지는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동시에 주몽성제께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대국으로 섬길 것을 청하니 성제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왕으로 책봉하시며 ‘어하라(於瑕羅: 소서노가 다스리는 지역일대 명칭으로 고구려의 제후국 의미)’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소서노왕이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고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으나 어머니만 못하여 실정(失政)을 거듭하였다.
“난 선덕여왕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 생각했었는데…….”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나라를 열고 왕이 된 것은 몰랐습니다. 여장부를 넘어서는 여걸이라 하겠습니다.”
“한참 후의 일입니다만 우리 일본에도 소서노 같은 여왕이 있었지요. 히미코(卑彌呼)여왕이라고…….”
“진구(神功)여왕이 아니고?”
첫째가 되물었다.
“아, 예. 히미코와 진구여왕은 같은 사람이라고도 합니다만, 우리 일본고대사에서는 논쟁거리입니다. 저는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대마도와 규슈일대를 통일한 여왕이지요.”
“그 여왕이 우리나라의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과 연관이 있다던데?”
“가야 김수로왕과도 관련 있다는 설도 있고요, 암튼 한반도에서 왔다는 주장이 많습니다만…….”
첫째와 막내의 얘기 중에 둘째가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중국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있었고…….”
비류의 동생 온조는 어머니의 위업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비류에 실망을 느껴 마려(馬黎) 등의 신하들과 함께 바다 건너 마한으로 이주하여 도읍지를 물색하였다.
이때 마한은 진한, 변한을 아우르는 남 삼한의 맹주로서의 역할을 하던 월지국이 쇠망하자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 무주공산의 상태였다.
온조는 처음엔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 일대)에 이르렀으나 사람이 적어 도읍지로는 미흡하여 한산(漢山: 서울 일대)의 하남 위지성(慰支城: 일명 위례성,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 도읍지를 옮겼다.
북으로는 한수(漢水: 한강)를 끼고, 동으로 험준한 산과 지형이 천연 요새로서의 지리적 이로움이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평야를 보듬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인접하였으니 가히 천년도읍지라 할 수 있었다.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가 고구려를 떠나 처음 자리 잡았던 백제성과 그곳에서 대업을 성취한 어머니를 기리고자 국호를 백제로 하였다. 그러고는 북부여를 재건한 외조부 동명왕의 사당을 지어 시조로 모시며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삼국사기』에는 ‘위례성에 도읍할 시 10명의 신하가 도왔으므로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비류가 죽자 그 백성들이 온조에 복속하여 백제로 고쳤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처음부터 백제였는데 무슨 십제? 김부식이가 소설을 썼구먼, 비류가 죽자 백성들이 나라를 백제에 바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첫째의 말에 토를 달듯이 했다.
아우만 못한 비류가 죽자 그 백성들이 온조에게 복속키로 하자 온조 임금은 어머니 소서노가 쓰던 어라하의 칭호를 계승하고 그 땅을 백제의 속지이자 분국으로 운영하며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이 무렵 고구려 개국공신 협보(陜父)가 2세 왕 유리열제와 의견 충돌로 조정을 떠나 마한산(지금의 평양)에 은거하던 중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바다를 건너 일본의 규슈지역의 구야한국(狗琊韓國: 현재의 후꾸오까 일대)에 잠시 머물다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주몽성제의 뜻을 다시 펼치고자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웠다.
온조임금은 개국 이후 북쪽의 낙랑국과의 우호를 다지면서 한수이남 마한, 변한 지역의 여러 나라를 복속시켜 마침내 마한 왕을 겸직하며 한반도의 중서남부 일대의 맹주로 성장하였다.
한편으로는 대륙의 분국에 인접한 낙랑군과 말갈의 잦은 침입을 물리치면서 오히려 영역을 확장하였다.
“아니! 백제가 한반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에도 있었단 말인가?”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얘기는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첫째는 나의 놀라움에 답을 하면서도 그 역시 믿기지 않은 듯 말끝을 흐렸다.
온조왕의 아들 다루(多婁)왕 때는 자명고(自鳴鼓)를 가졌다는 낙랑국을 고구려 대무신왕과 연합전으로 멸망시키고 낙랑국 남부일대와 동옥저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 아들 기루(己婁)왕은 고구려의 태조열제와 연합하여 대 선단(船團)과 군대를 보내 요서공략을 하여 요서일대를 장악하였다.
그 후 8대 고이(古爾)왕 때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과 낙랑(군)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이 합동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낙랑의 국방이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여 수천의 주민들을 포로로 잡고 수많은 물자를 노획하였다.
10대 분서(汾西)왕은 낙랑군의 서부현을 기습 공격하여 백제영토로 삼았으니 요서가 백제의 영역으로 되었다. 낙랑의 자객에 의해 분서왕이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으나 백제는 북중국의 요서에 머물지 않고 대륙의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남 중국 구석구석 식민지를 만들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고 남평양(현재의 평양)을 점령하여 상한성(上漢城: 지금의 황해도 재령)으로 천도까지 한 13대 근초고(近肖古)왕 14대 근구수(近仇首)왕 이후 고구려 광개토열제에 의해 잠시 지배당하기도 했지만 대마도와 야마토(大和) 왜(倭)를 속국 내지 위성국가로 삼았다.
“그렇구나. 임나는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이 나누어 분할 통치하던 때를 삼가라(三加羅: 신라계 좌호가라, 고구려계 인위가라 백제계 계지가라)라 하였구나. 두 섬 중 큰 섬에서 지금의 사고(佐護)평야는 신라가, 나머지 닌이(仁位)평야는 고구려가, 따로 떨어진 게이찌(鷄知)평야가 있는 섬은 백제가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 통치자를 한(汗)이라 했으며 통틀어 삼한 또는 삼가라라 불렀고, 히미코와 진구가 결국 같은 사람이었으며, 진구여왕이 이를 통합하였고 후에 백제, 고구려에 의해 속국이 되고……. 이를 두고 ‘삼한’이라 기록하였구나.”
“막내, 무슨 말인가?”
막내가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첫째가 정색하며 물었다.
“예, 형님. 『일본서기』에 ‘삼한’이라는 기록이 있는데(是所謂之三韓也), 삼가라의 통칭으로 삼한이라 쓴 것 같습니다. 진구여왕이 삼가라를 통합한 것을 임나의 한반도 ‘삼한정벌론’으로 왜곡한 것이고요.”
“삼한정벌? 진구여왕이 한반도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신라에서 온 왕족이었잖은가? 신라왕족이기 때문에 백제계 고구려계 유민들의 저항이 컸는데 최종적으로 백제계로 정권이 넘어가고 말았지만, 삼한정벌이라니! 말 그대로 역사의 왜곡, 아니 날조하였네.”
내가 잠시 동안 지켜봤던 임나의 변천 과정을 염두에 두며 한마디 거들어 보았다.
“아무튼 진구여왕이 여걸임에 틀림없습니다. 동생을 권좌에 밀어내고 천하를 호령한 모습은 일본인들이 신격화시킬 만합니다.”
“일본의 왕조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권력 쟁투의 중심지였습니다.”
둘째가 결론을 짓듯이 말했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섭라(涉羅: 탐라, 제주)를 점거하여 남방항로의 기항지로 삼는 한편, 뛰어난 조선기술(造船技術: 방‘舫’이라는 대형 선박제조기술, 왜에서는 크고 튼튼한 배의 대명사로 구다라선 ‘百濟船’이라 함)과 항해술로 섬라(태국), 부남국(캄보디아), 인도와 교역하면서 유구국(流球國: 오키나와)을 중간기점으로, 북 규슈와 대만해협을 지나 흑치국(黑齒國: 필리핀군도)에 이르는 상설항로를 개척하였다.
22개 개척지역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담로(擔魯)라는 관직으로 총괄 통치자로 주재시켰다.
“제가 연전에 한국을 방문하여 백제 금동 대향로를 본 적이 있는데 신비로움과 예술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 새겨진 동물, 특히 코끼리나 악어 등을 보면서 백제인들이 이런 동물들을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풀립니다. 동남아 지역은 물론 인도까지 넘나들었던 백제인들이니 모를 리 없는 것이지요. 그 향로는 백제가 해양제국을 건설한 상징적인 물건일 수 있습니다. 정말 세계적인 보물입니다.”
막내가 새삼 감탄하듯 말했다.
“백제판 해상 실크로드이군요.”
“해상 실크로드? 멋진 표현일세, 허허.”
둘째의 말에 내가 답하며 웃자 모두가 같이 웃으며 동감했다.
“그런데 필리핀을 흑치국이라 했는데 혹시 백제멸망 후 부흥군 장수였던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연관이 있을까?”
내 물음에 둘째가 얼른 대답한다.
“나중에 확인되겠습니다만, 맞을 겁니다. 우리가 당나라 역사를 배울 때 반드시 등장하던 장군으로 낙양시 북망산에 묘가 있습니다. 묘지명(墓誌銘)에 그 선조는 부여 출신이고 흑치에 봉해져 그 자손이 성으로 삼았다(其先出自扶餘氏封於黑齒子孫因爲氏焉)고 했습니다. 부여 출신이란 백제를 말한 것이고 흑치라는 지역의 수장으로 봉해졌음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흑치상지가 중국역사에서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인물인가?”
“그건 중국에 귀순하여 돌궐과 티벳 정벌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 나는 몰랐네. 그가 당나라에 귀순했었구나.”
“‘그는 품성이 빼어나고 굳세면서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했으며, 힘으로는 무거운 빗장을 들어 올릴 수 있었고 지혜로는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지만 자랑하거나 떠벌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았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측천무후가 ‘백제는 흑치상지가 있었는데 왜 패망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둘째는 첫째의 말에 부연하여 제 자랑처럼 설명해 주었다.
“백제로 봐서는 배신이지요. 당에 귀순하여 한때는 백제부흥군을 토벌하기도 했으니까요, 그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측천무후가 말한 것처럼 백제의 부흥이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구나, 안타깝구먼.”
“글쎄요, 흑치장군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과연 부흥군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당나라의 국력과 국제정세로 봐서는…….”
“그렇다고 나라를 배신해?”
첫째는 흑치장군을 변명하듯 하는 둘째의 말에 날을 세우듯 대꾸했다.
“허허, 그만들 하게나. 그런 위인들이 있기에 역사가 만들어진 것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런 위인들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집니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 엄밀히 얘기한다면 역사적 사실이겠지요. 역사적 사실을 후세 인간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기록하는가에 따라 또 다른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역사? 역사란 하나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건 역사적 사실인 것이지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은 분명 하나입니다만 기록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것도 오늘이냐, 내일이냐, 아니면 며칠 후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요.”
“역사가 달라진다? 사실은 하나인데 역사는 몇 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본 이 현장은 하나뿐인데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형님, 문제는 우리는 현장을 직접 보았지만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을 뿐 아니라 설령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이 기록을 한다할 지라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기록한다는 말이지? 그걸 소위 말하는 사관이라는 것이고?”
“맞습니다, 큰 형님. 요즘처럼 동영상이라도 이용하여 기록물을 만들지 않는 한 인간에 의해 기록되는 것은 그가 아무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주관적인 면은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건을 평가하고 기록하는 순간부터 이미 주관이 개입되는 판국에 하물며 10년, 100년, 1000년 이후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先史時代의 유물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기록물, 즉 역사서는 크든 작든 事實 또는 진실과는 歪曲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후후, 막내, 선사시대 유물도 조작하더군.”
둘째가 짓궂게 막내의 말을 끊고 끼어들자 막내의 당황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이에 첫째가 일본 미야기현 가미타카모리 구석기 유물 조작사건을 얘기해 주자 막내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더욱 일그러지듯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조작이나 날조는 역사에 죄를 짓는, 해서는 안 될 행위이겠습니다만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그릇된 신념이나 이념에 바탕을 둔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인 독선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막내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가 귀를 쫑긋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19세기 말 발견된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본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15,000년 전의 사람들이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발견자의 조작으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자신의 지식 한계로 인한 자만심이 낳은 편견이었음이 프랑스 남서부와 피레네산맥의 동굴에서 유사한 구석기 시대의 벽화가 발견되면서 밝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5,000년 전의 그 시대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生存에 급급한 무지몽매한 원시인들의 삶이 아니라 색감이나 질감, 그리고 입체감까지 표현할 정도로 발달된 문화와 문명이 존재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지요. 물론 자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편견이나 무지가 만들어낸 역사 왜곡이나 조작이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야. 무지나 편견 그 자체가 또 다른 왜곡과 조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 여행을 통해 배운 그대로야.”
“그렇다면 우리처럼 역사 현장을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들은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둘째는 막내나 첫째 동생을 번갈아 보면서 짐짓 질문은 나에게 하였다.
“첫째가 대답해 보게나?”
동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한다.
“우선 역사를 쓰기에 앞서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일 것입니다. 사실 이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숙제일 테지만, ‘역사는 다시 쓰여진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게 맞겠지요.”
“그럼 막내는 어떤가?”
“역사를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를 거를 수 없을 겁니다. 볼 수 없는 과거보다 오늘의 관점에서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잣대로만 본다면 과거의 역사는 모두 否定될 수 있는 함정이 있지 않을까?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주의가 보편화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과거의 모든 역사는 ‘전체주의’나 ‘독재주의, 권위주의’ 등의 부정적인 면만 보일 것이며, 과학발달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현재의 눈으로 본다면 지난 역사는 무지의 역사요, 빈곤의 역사로 전락(顚落)될 수도 있고.”
“물론입니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듯이 현재를 역사 발전의 결과이자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무시 또는 否定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역사 여행을 하다 보니 더욱 뼈저리게 느낍니다.”
“문제는 시대적 상황을 얼마나 잘 파악하느냐에 달렸겠지, 우리처럼 이렇게 역사 현장에 있다면 쉽겠지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봤던 정림사 5층 석탑에 새겨진 기록이 생각납니다. 편견에 의한 역사 부정의 사례가 있습니다.”
막내가 화제를 슬쩍 돌렸다.
“음, 소정방이가 썼다는 그 기록?”
“예 맞습니다. 그것 때문에 옛날에는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리었지요.”
“그래, 내가 학생 때 그렇게 배웠어. 소정방이가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세웠다고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더군, 원래 있던 탑에 새긴 것이라 하더만……. 그런데 그 기록이 왜?”
나는 막내에게 되묻고는 첫째에게 눈길을 돌려보았다. 첫째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백제의 멸망과정 등 명예롭지 못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만 했다.
“물론 명예롭지 못한 기록입니다만 그 내용 중에 백제의 강성했던 국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무심코 넘겼다가 몇 번 읽어 보면서 의문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만 오늘에야 그 궁금증이 풀린 것입니다.”
“그게 뭔가? 소정방이 그걸 기록했단 말인가?”
첫째는 매우 당황스럽게 물었다.
“그 기록 중에 「凡置五都督府 戶二十四萬 口六百二十萬」란 구절이 있습니다. ‘5도독부를 두었으며, 24만호에 인구가 620만이다’라는 뜻이지요. 5도독부란 웅진(熊津)·마한·동명(東明)·금련(金連)·덕안(德安)이었는데요, 그런데 웅진도독부는 백제 도읍지에 위치하였으나 마한, 동명, 금련, 덕안의 도독부는 어디인지 알 수 없고요. 아마 중국 대륙의 어딘가 싶습니다만 무엇보다 24만호에 인구가 620만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한 가구당 5명을 기준으로 한다 하더라도 24만호면 120만에 불과한데 620만은 어디서 나온 수치일까요? 작은 형님, 통일신라시대 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이었는지 첫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흠, 글쎄 전성기 때 경주가 20만호라 했으니 3~400만 정도?”
“그렇지요, 당시 통일신라 인구를 3~400만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통일신라의 절반도 안 되는 한반도의 백제가 620만은 너무 많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맞는 말일세!”
“그렇구나!”
나와 첫째는 거의 동시에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만 만일 도독별 24만호라고 가정해 본다면 120만의 5배이니 비슷한 수치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웅진도독부는 백제에 있었다지만 나머지 도독부는 중국의 어디엔가 있었다는 겁니다. 인구 620만이라는 수치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중국 대륙에 있던 속국이나 식민지 지역을 아우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백제는 멸망할 때까지 대륙에 백제 땅, 즉 백제라는 나라가 있었고 당시의 소정방은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당나라가 백제부흥운동이 본격화되자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파견한 군사가 나당연합군의 13만보다 더 많은 군을 파견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했는데 단순히 한반도내의 부흥군 때문에 그 많은 병력을 보낸 것이 아니구먼,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 내 곳곳의 백제부흥운동이 치열하였기에 대 병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겠구먼.”
“우리 중국 땅에 백제라는 지명이 곳곳에 있는데 지금 보니 그게 모두 백제의 속국이거나 식민지였던 흔적이었네요.”
“우리가 오늘 본 백제가 해양제국을 건설한 백제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서남쪽 일부를 차지한 조그마한 나라로만 기억했던 편견 때문에 정림사지의 탑에 새겨진 기록을 무심코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이 역시 무지나 편견에서 나온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이자 날조가 아니겠습니까?”
백제의 해외진출과 대 제국으로서의 국가경영은 200여 년간 지속되면서 24대 동성(東城)왕대에 절정을 이룬다.
중국 산동반도(山東半島)에 分國의 도읍지인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북경 지역과 산동성, 장강(揚子江)이남 진평(晉平: 현 상해일대)을 식민지로 경영하였다. 나라의 규모가 커지자 단군조선의 삼환관경제의 체제를 도입하여 백제대왕을 축으로 하여 중국대륙을 관장하는 우현(右賢)왕, 일본은 좌현(左賢)왕이 관장토록 하였으며 주요 지방은 제후로 봉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동성왕조에 ‘위나라 군사가 침략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대륙에 있는 위나라가 바다 건너 수천 리 떨어진 백제를 어떻게 침략했는지 의문이었는데 우리가 본 것처럼 이제 보니 대륙에 있는 백제를 침략하다가 백제군에 의해 쫓겨난 것입니다. 그것도 북방을 통일했다는 북위의 효문제(孝文帝)가 두 차례나 수십만을 이끌고 침략했다가 백제군에 의해 몰살당한 것이군요.”
“야간 기습에 무너지는 위나라 군사들의 모습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가는 것 같았는데 말 그대로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작전이었습니다. 몰살당한 것 아닙니까?”
둘째는 자신이 전투에 참가하여 공이라도 세운 듯 말한다.
“시산혈해(屍山血海)라 했던가요? 위나라의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동성왕은 수훈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지역별 제후격인 면중(面中)왕 저근(姐瑾)을 도한왕(都漢王)으로, 팔중후(八中候) 여고(餘古)를 아착왕(阿錯王)으로, 건위(建威)장군 여럭(餘歷)을 매로(邁盧)왕으로, 광무(廣武)장군 여고(餘固)를 비사후(弗斯侯)로 임명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요서에 진출한 백제군이 위기에 처하자 대륙에 장군들을 파견하여 그 전쟁에서 이긴 사법명(沙法名)을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贊首流)를 벽중왕(辟中王)으로 삼고, 해례곤(解禮昆)을 비중후(弗中侯)로, 목간나(木干那)를 면중후(面中侯)로 임명했다.
“남제서(南齊書)에 왕이 왕을 봉했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 했더니 백제왕은 이미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적은 것처럼 황제와 동격의 왕이었습니다.”
“자네는 한국사 교사인 나보다 더 우리 역사를 많이 알고 있네.”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것이지요. 미스터리투성이였는데 하나씩 풀려가니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좀 전에 보니 광양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낙랑태수, 성량태수, 조선태수로 제나라 왕이 중국의 관직을 제수했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이죠?”
중국인 둘째가 우리에게 조금 시비조로 물었다.
“맞아요, 남제서 백제전(百濟傳)에도 중국 제나라가 작위를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전 이렇게 봅니다. 즉 제나라가 북쪽에서 밀려 중국 남부에서 왕조를 형성했으나 그 세력이 허약하기에 강국 백제의 힘을 빌려 왕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백제와 화친을 도모하고자 하였고, 본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식민지나 속국을 만든 백제 역시 漢족과 토착인을 효율적으로 지배 통치하려면 명분이 필요할 것이고 중국의 관직이 그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요즘말로 상생(win-win)의 전략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일종의 겸직이라 할까요.”
막내는 잠시 말을 멈춰 숨고르기를 하더니 말을 잇는다.
“심지어는 북제서(北齊書)에는 ‘백제왕 여창(余昌: 27대 威德王)을 사시절(使侍節: 황제의 신임표시의 증표)도독(都督: 군사책임자) 및 동 청주(靑州: 산동 반도일대) 자사(刺史: 행정책임자)라는 여러 직책을 한꺼번에 하사하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산동반도가 백제의 땅임을 묵시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공부를 하면서 중국 25사에 백제에 대한 기록이 많은 것을 보고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오늘에야 풀렸습니다. 백제의 대륙 경영이 그들의 역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막내의 진지한 설명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중에 첫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삼국사기』의 최치원 열전에 최치원이가 당나라 조정에 보낸 편지에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기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는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주, 연, 제, 노를 괴롭히는 중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라는 기록이 있어, 과장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침범이 아니라 아예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동성왕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손수 대륙의 식민지를 개척 운영하느라 혼신을 다하던 중 현지에서 죽을 정도였겠습니까?”
“좀 더 큰일을 이룰 수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아까웠습니다. 광개토열제나 알렉산더 대왕이 연상됩니다.”
둘째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동성왕의 장례식은 본국의 태자(무령왕)의 주도 아래 식민지 및 제후국들의 수많은 조문객이 참여한 가운데 장엄하게 거행되고 산동반도에 묻혔다.
“가만 있자~ 백범 김구 선생님이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피신하였을 때 장개석 총통이 백범선생을 위로하며 ‘자신의 고향은 옛 백제의 땅’이라고 했을 때 백범선생은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의 의미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무지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생각나는구먼.”
“예, 큰 형님, 장총통의 고향이 절강성(浙江省)이니 우리가 본 백제의 식민지 그 자리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장총통도 인정하는 대륙 백제의 위상을 우리가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일세.”
“형님,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가 또 있습니다. 발해입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습니다만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소외되었습니다.”
“발해?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 말이지? 요즘 TV드라마도 나오는 등 재조명을 받고 있지 않나?”
“물론 근간에 발해에 대해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만 아직은 우리 역사의 번외(番外) 역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번외 역사라…… 하긴 내가 아는 발해는 대조영이가 건국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으니…….”
“발해는 우리 중국의 지방정권의 역사로 알고 있습니다. 당나라에서 발해라는 국호를 내려준 것으로 압니다만.”
“제 견해는 좀 다릅니다. 당시 일본과 발해가 많은 교류를 했는데 그 당시 주고받은 국서에 보면 고구려의 후예이고 대진(大辰)이라는 국호를 사용했으며 황제의 나라이던데요?”
이에 첫째가 막내의 말에 맞장구치며 말한다.
“그렇지! ‘대진국’이었지. 辰은 조선을 뜻하는 辰韓에서 유래된 것이고, 당나라에서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인정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나라였어.”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우리 눈으로 확인하세나.”
“예, 간 김에 고려의 북방 영토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시죠? 특히 윤관장군이 개척했다는 9성을 꼭 보고 싶습니다.”
“윤관장군의 9성? 그곳은 왜? 내가 알기로는 9성은 발해 쪽이 아니라 함흥일대로 알고 있는데.”
“저 역시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만 앞뒤가 안 맞는 게 있습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여진을 정별하고 공험진(公險鎭)과 선춘령(先春嶺)에 비(碑)를 세워 국경을 삼았다고 했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공험진은 경흥에서 700리, 선춘령은 공험진에서 동북쪽으로 700리라 했는데 이곳은 두만강 북쪽 지역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북간도 지역인 것입니다. 결코 함흥일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간도 지역이 우리 땅이었다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조선시대 말까지도 간도 지역이 우리 땅이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겁니다. ‘백두산경계비’나, 소위 ‘간도 협약’의 근원이 밝혀지는 것이지요.”
“흠, 우리 구한말(舊韓末)에 우리 민족이 간도에 많이 이주한 것이 우리 땅을 되찾고자 한 의미도 있었구먼. 그래 어서 가 보세나. 잃어버린 땅은 못 찾을지라도 역사는 찾아야겠지.”
대진국의 어느 시점, 장소를 정하고자 하는데 갑자지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신령이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네.”
“예?! 아직 가야 할 곳이 너무나 많은데, 벌써입니까?”
모두가 아쉬운 표정으로 신령을 보았으나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신령님,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들을 보고 갈 수 없을까요?”
내말에 모두들 하나 같이 애원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냉정히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일이야. 이미 소멸된 인연인데 그들을 봐서 뭐하게? 벌써 수백 년이 지났다네. 그들도 이승의 인연을 끊고 이곳에 머물고 있을 걸세.”
「하늘에서의 역사 기행」 (끝)
“우리가 오늘 본 백제가 해양제국을 건설한 백제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서남쪽 일부를 차지한 조그마한 나라로만 기억했던 편견 때문에 정림사지의 탑에 새겨진 기록을 무심코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이 역시 무지나 편견에서 나온 또 다른 역사의 왜곡이자 날조가 아니겠습니까?”
끝.
‘하늘에서의 역사기행’은 안경전(安耕田) 역주(譯註) 『한단고기(桓檀古記』를 주 내용으로 하여 소설로 써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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