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의 역사 기행
- 11부 은나라의 정벌과 백이 숙제
한밤중의 자료실은 써늘하였다. 수많은 자료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막내는 그 많은 책 중에서 한 묶음의 책을 가져왔다. 1926년 경도제대에서 발간한 『삼국유사』 영인본(影印本)이었다.
“조선 중종임금 때 발간한(1512년) 임신(壬申)본을 촬영한 것입니다.”
막내가 책을 건네주자 첫째는 얼른 책장을 넘겼다. 기이(奇異)편이었다.
……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
집현전에서 봤던 책의 글씨와 비슷하나 ‘석유환인(昔有桓因)’의 ‘因’과 ‘開城東’의 ‘開’자는 가필(加筆)한 흔적이 있는 것처럼 깔끔치 못했다.
그가 생전에 보았던 책은 현대판 활자로 대량 인쇄된 것이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읽었으나 집현전에서 원서라 할 수 있는 책에서 ‘昔有桓國’ 「關城東」을 보면서 그 무엇인가 석연찮은 것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집현전에서 본 것과 왜 다른가? ‘석유환국’과 ‘석유환인’? 「關城東」, 「開城東」? 단순한 가필이나 오기(誤記)는 아닌 듯한데. 막내는 이 책의 원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발간 서문에 보다시피 서문을 쓴 경도제국대학 교수 후찌후지도라(內藤虎次郞)의 조교였던 이마니시 류(금서룡)라는 학자가 소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후지도라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명(明) 정덕(正德) 임신년(壬申年: 서기 1512년)에 경주 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본사(사기)』와 『삼국유사』 양본이 다른 곳에서 간행한바 없는 귀한 것인데 임진왜란 때 왜장들이 일본으로 가져가 당시에는 미장(尾張: 현재 나고야 일대)의 덕천후(德川侯: 도꾸가와)와 동경의 신전남작(神田男爵)이 각 1통 소유하고 있었다. 신전 소유본 『삼국유사』 정덕본을 동경대학에서 소량 영인한 것을 경도재국대학 조교 이마니시(今西龍)가 1부 소장하고 있어서 이를 경도제국대학에서 다시 대량 영인하였는데 이를 ‘경도제국대학 영인본’이라 한다.』
“이마니시 류? 그 사람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조선고대사와 관련하여 대가이지요. 우리 일본에서는 조선고대사를 연구하자면 그분의 학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막내, 그 사람은 우리나라 역사를 식민주의 역사로 왜곡한 사람인데? 어쨌든 동경대학에서도 영인한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 책은 없는가?”
“그 책은 저도 못 봤습니다. 하지만 1904년 대학에서 인쇄한 것은 있긴 합니다만.”
“그래? 그 책을 볼 수 있을까?”
“저도 못 봤습니다만 찾아보지요.”
막내는 얼마 동안 이곳저곳 돌아다니더니 책을 가져왔다.
임신본(정덕본)을 현대적 활자체로 인쇄한 책이다.
“이 책은 휘귀본으로 열람이 되지 않는 책이군요.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허허 막내가 수고했네.”
둘째가 한 마디 건네주는 사이 첫째가 외쳤다.
“아! 여기는 석유환국이야! 그리고 關城東이고요.”
“예!?”
우리보다 막내가 더 놀랐다.
“그러면 누군가 조작을 했다는 것 아닌가? 동생.”
“그렇습니다. 1904년까지만 해도 원본대로 인쇄를 하였으나 그 후 원본을 가필하여 영인본을 만든 것입니다.”
“형님 조작한 사람은 뻔합니다.”
“뻔하다니? 누구란 말인가? 둘째?”
“서문을 썼다는 후지도라 교수와 그 조교라는 이마니시인 거죠.”
“역시 자네가 공안요원이다 보니 감이 잡히는가 보지.”
“후지도라와 이마니시라~”
내가 그들의 이름을 되뇌다 보니 머릿속에 중년의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이마니시 류였다. 경도대학 조교수로 있으며 「단군고(檀君考)」라는 박사학위논문을 집필 중에 있었다.
그는 1904년 동경대에서 인쇄한 『삼국유사』 본 내용 중 ‘석유환국의 국(國)은 간본(원본)의 문자 인(因)이 와왜(訛歪)되어 국(国)에 가깝기 때문에 國으로 한 것이다. 이는 단군전설에 있는 제석환인(帝釋桓因)을 무시하여 환국이라 칭한 것으로 위제석야(謂帝釋也)라는 주석에 따라 석유환국이 아니라 석유환인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서 후지도라 교수와 공모하여 『삼국유사』 정덕본(임신본)을 극비리에 国을 因으로, 關을 開로 사개(詐改), 가필(加筆)로 원본보다 축소한 상태로 영인(影印)하여 ‘경도제국대학 영인본’이란 이름으로 관계 요로에 다수 배부하였다.
(왼쪽이 정덕본이며 오른쪽이 경도대학 영인본임. 1932년 9월 서울의 고전간행회에서 경도대 영인본을 원형 크기로 발행하였으며 이를 근본으로 하여 조선사학회명의로 활자본을 대량 발간하여 보급하였다.)
이마니시 류는 ‘위제석야(謂帝釋也)’에서 제석이 제석천환인(帝釋天桓因)의 줄임말임을 근거로 두고서 일연스님이 환국의 환인(桓仁)천제를 불교의 神 환인(桓因)과 동일시한 것을 十分 이용하여 환국을 국가가 아닌 신화적 인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도읍지를 관성(關城: 중국 산동성 산해관)의 동쪽을, 한반도 개성(開城)의 동쪽으로 변조함으로써,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축소하였고, 반도식민사관을 심어 놓은 것이다.
한편, 책이 개서(改書)되었음을 알게 된 육당 최남선은 이를 개서(改鼠: 쥐 뜯어 먹은 것처럼 글씨를 고치는 것)라 말하면서 1932년 7월 21일 조선사편수회 회의석상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일본인들을 크게 당황시켰다.
“고서의 인용을 함부로 개서(改鼠)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한 일이며 이는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다.”
그러나 육당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원상회복됨이 없이 ‘석유환인’이 적힌 『삼국유사』는 유통되었다.
머릿속에 연상되던 것을 동생들에게 그대로 애기해 주었더니 첫째가 주먹 쥔 채 치를 떨며 말했다.
“축소 영인본, 원형 크기 영인본, 활자본 등 여러 형태로 보급한 것은 그들이 『삼국유사』를 개서한 것을 감추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맞아. 그들의 술책에 따라 우리 역사는 뿌리 자체가 고사(枯死)될 뻔했어.”
“나쁜 사람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날조하려고 한 것이지요?”
“환국의 환인은 물론 배달의 환웅, 조선의 단군왕검까지 신화로 둔갑시켜 조선의 실제 역사가 반만 년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보다 짧은 겨우 2천 년의 역사로 만들고 싶었던 거지. 물론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내로 축소시키고자 했고. 어때 막내?”
“글자 하나가 그처럼 엄청난 결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마니시 류는 일본에서 존경받는 역사학자인데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충격입니다.”
“막내, 그 사람은 점제현 신사비도 만들어 낸 사람이야! 자기 나라 역사를 높이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겠지만 일본 역사학자들은 그 도가 지나친 것 같아. 여기서 보니 왜곡의 정도가 아니라 날조와 역사말살을 너무 많이 했어~”
둘째가 막내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저도 공부를 하면서 몇몇의 의문점이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라도 사과드립니다.”
“뭐, 막내가 사과할 것까지 있남. 이 지경이 오도록 제 나라 역사를 지키지 못한 우리 한국인들의 잘못도 크다고 보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인식하면 되겠지. 막내, 현재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곳이 단군조선이니까 최소한 단군조선만은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할 수 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단군조선뿐만 아니라 배달, 환국도 믿습니다.”
“그래 우린 계속 단군천자님을 뵈어야지…….”
그사이 17세 여을(余乙)단군, 18세 동엄(冬奄)단군, 19세 구모소(緱牟蘇)단군, 20세 고홀(固忽)단군을 지나 21세 소태(蘇台)단군시대에 이르렀다.
소태 단군천자께서 즉위하자 은나라 21세 소을왕이 가장 먼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재위 47년에는 은의 무정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의 속국 삭도(索度: 지금의 산동성 임치현 일대)와 영지(令支: 지금의 하북성 천안현 일대) 등의 여러 나라를 침공하였다가 대패하고 화친을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재위 49년에는 개사원(蓋斯原)의 수장인 욕살 고등(高登)이 은나라의 귀방(鬼方: 산서성 북쪽의 내몽골 음산산맥 일대의 부족국) 등 서북지방 천여 리를 경략하여 환국의 12국이었던 일군(一君), 양운(養雲) 두 나라를 다시 복속시켜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이후 고등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신하들의 주청에 의해 고등을 부 단군격인 우현 왕으로 임명하시고는 그를 두막루(豆莫婁: 우두머리란 뜻)라 불렀다.
재위 52년 천자께서는 나라를 순시하시다가 남쪽 해성에 이르러 오가(五加)를 모이게 하여 ‘내가 이제 늙어 일하기가 고달프도다.’ 하시며 옥좌를 양위할 뜻을 전하자 신하들의 만류로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섭정토록 하시고는 장차 재위를 서우여에게 선양코자 하셨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우현왕 색불루(索弗婁: 고등의 손자)는 천자께 선위계획을 만류하였으나 천자께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색불루는 크게 반발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혁명을 일으켜 백악산 아사달(오늘의 만주 농안 일대)의 부여 신궁(단군왕검의 4째 아들인 부여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곳: ‘부여’라는 나라가 여기서 유래)에서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이에 천자께서는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옥책과 국보를 우현왕 색불루에게 전하시고 옥좌를 양위하신 후 장당경 아사달(지금의 하얼빈)에서 은거하여 최후를 마치셨다.
소태천자로부터 옥좌를 이어 받으신 22세 색불루 단군천자께서는 즉위하시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도읍지를 옮기는 것이었다.
옛 배달의 도읍지 신시와 가까우며 천자께서 발흥하신 백악산 아사달에 성을 개축하여 그곳을 새 도읍지로 삼았다. 이로써 백악산 아사달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어 천자께서는 삼한을 삼 조선체제로 바꾸시고 삼한이 하나로 통일되어 진한을 진(辰: 진조선), 마한을 막 조선, 번한을 번 조선으로 개칭하여 진(辰)국을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단군관경(檀君觀境: 단군의 영토관할) 체제를 갖추셨다.
마한의 20세 왕 여원홍을 막 조선왕으로, 단군의 옥좌를 두고 자신에게 대항하였던 서우여를 30세 번조선왕으로 임명하셨다.
그 해 11월 조공을 바치던 은나라가 반기를 들자 이듬해 2월까지 친히 9환족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 한동안 은나라 수도를 함락하기도 하였고 은의 세력권인 황하강 상류까지 진출하여 회수(淮水)와 태산 지역에 번한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하셨다.
재위 20년에는 번조선 관할의 신흥 제후국 남국(藍國)과 고죽국이 연합하여 은의 남쪽 지방을 경략케 한 후 은나라 국경과 마주한 엄독홀(奄瀆: 후일 공자가 태어난 곡부다.)에서 오랫동안 머무셨다.
또한 남국의 장수 여파달(黎巴達)을 보내어 은의 영토인 빈(邠), 기(岐)를 공략하여 그곳의 옛 유민(치우천황의 후예)들과 합세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셨으니 여(黎: 치우 천황 때의 九黎를 약칭)나라이다. 여는 은의 영토에서 남국의 후원아래 은나라 제후국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은나라를 견제하고 압박하였다.
재위 36년에는 변방 장수 신독이 난을 일으켜 그 기세가 자못 강세하여 아사달까지 위험하게 되자 잠시 영고탑으로 피난하시어 번조선, 막조선의 군사를 양방으로 동원하여 진압하셨다. 난을 일으킨 신독은 은나라로 망명하였다.
또한 천자께서는 즉위 초에 8조문의 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교화하시니 곧 팔조금법(八條禁法)이다.
1조,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相殺以當時償殺)
2조,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한다. (相傷以穀償)
3조, 도둑질하면 그 집의 노비(奴婢)로 삼는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조, 소도를 훼손한 자는 징역(금고)에 처한다. (毁蘇塗者禁錮)
5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 (失禮義者服軍)
6조,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한다. (不勤勞者徵公)
7조,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 (作邪淫者苔刑)
8조, 남을 속인 자는 교육 후 석방한다. (行詐欺者訓放)
이로써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과를 속죄하여 공민이 되었다 하더라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장가를 갈 수 없었으며, 도둑이 없어 문을 닫는 일이 없고 여자들은 정숙하고 음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배운 고조선 팔조금법이 생각나는구먼.”
“형님 기억력도 좋습니다.”
“글쎄다. 상식인 내용이다 보니…….”
천자께서는 재위 48년에 붕어하시고 태자 아홀(阿忽)께서 즉위하시니 23세 아홀단군이시다.
23세 아홀천자께서는 아우 고불가(固弗加)를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시고 신하 웅갈손(熊㐓孫)을 보내 남국왕과 함께 남방의 은나라를 정벌토록 하였으나 은나라의 저항이 워낙 심한지라 친히 군사를 끌고 진군하여 격파하여 6개의 읍(邑)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은나라로 망명했던 신독을 잡아 목을 베고 환도하여 전승(戰勝)을 기념하면서 죄수와 포로들을 석방하셨다.
천자의 남진 공략으로 은나라가 점차 세력이 약화되자 이듬해 남국, 청구국, 구려(黎: 여)국, 그리고 몽고리한 네 개의 제후국이 합동으로 대대적으로 은을 공격하고 은나라 깊숙이 침공하여 회대(淮岱: 회수와 태산) 일대를 평정 후 포고씨를 엄(淹), 영고씨를 서(徐: 서언왕의 시조), 방고씨를 회(淮)로 봉작을 내리시니 은나라에서는 감히 대들지 못하였다.
그 후 나라는 태평강국하니 재위 76년에 어천하시고 24세 연나단군, 25세 솔나단군, 26세 추로단군에 이르기까지 150여 년 동안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이즈음에 제후국이었던 고주국(孤竹國: 북경 및 화북성 일대)의 왕자 백이, 숙제가 왕위를 뿌리치고 주나라 무왕을 만나러 가던 중 무왕이 강태공과 함께 은을 멸망시키자 주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백이숙제의 전설을 만들었다.
“아뿔싸, 백이숙제도 동이족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충절의 표상으로 여기던 인물이었는데. 그런데 강태공이 바로 우리 조상인데 그분도 치우천황 님의 후손이시니 저도 동이족인 것입니다.”
“후후, 동생도 우리와 같은 뿌리인 셈이네.”
“이제는 동이족의 후손인 것이 더 영광입니다.”
“한족(漢族)도 환(桓)족에서 분리된 것인데 동양 삼국은 같은 뿌리일 수밖에…….”
“그렇지요. 우리 일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백이숙제 비석이 식은땀을 흘린 사실을 아시는가?”
첫째가 둘째에게 물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성삼문이 지은 시 때문에 백이숙제 묘비가 식은땀을 흘렸다는 것 아닙니까?”
“저도 알고 있습니다.”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어먹다가 굶어 죽었다는 것은 들었네만, 무슨 내용인데?”
“아이고, 형님은 모르셨군요. 제가 설명해 드리죠.”
첫째가 설명해 주었다.
『조선 세종 때 성삼문이 서장관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를 방문하는 길에 백이숙제의 비문을 보고서 시한수를 지어 붙였다.
當年叩馬敢言非(당년고마감언비)
은나라 치러갈 때, 말고삐 부여잡고 그릇됨을 말할 때는
大義堂堂日月輝(대의당당일월휘)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草木亦霑周雨露(초목역점주우로)
초목도 주나라의 비와 이슬을 먹고 자란 것이거늘
愧君猶食首陽薇(괴군유식수양미)
부끄럽게도 그대들은 어찌 수양산 고사리를 먹었는가?』
“오라, 그 내용이었구나. 백이숙제가 식은 땀 흘릴 만하구먼. 그 비슷한 시조는 아는데……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지언정 채미를 하는 것 가,
아무리 풋새 엇 것인들 그 뉘 땅에 낫더니.’”
“그런데 훗날 한 선비가 ‘후세의 사표가 되신 분들인데 너무 곤란함을 겪는다’며(붙입니다.) 변명의 글을 붙였답니다.”
이어서 막내는 시를 읊었다.
“‘잎은 주나라 때 잎이라 먹지 않았고(葉周葉而不食: 엽주엽이불식), 뿌리는 은나라 뿌리이기에 캐어서 먹었노라(根殷根而採之: 근은근이채지)’ 그러자 그 후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답니다.”
“하하, 백이숙제가 성삼문의 기개에 혼쭐이 났구먼, 하기야 살을 태우는 인두나 망나니의 칼조차 성삼문의 기개를 꺾지 못했으니까…….”
27세 단군 두밀(豆密)천자께서는 26년간 재위하셨고 재위 중 천해(天海: 현 바이칼호)의 물이 넘치고 사아란산(斯阿蘭山: 바이칼호를 둘러싼 인근 샤안산맥)이 곳곳이 무너지거나 심한 가뭄 끝에 폭우가 내리는 등 재해가 많았다.
재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자 나라의 창고를 열어 두루 나누어 주셨다. 즉위 원년에는 배달국 이후 독자적인 나라로 계승해온 환국의 12국 중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형님, 환국의 열두 나라 중 세 나라가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군요.”
“환국의 12국이라뇨? 환국은 3천 년 전의 나라가 아닙니까? 저 나라들이 환국의 나라였다는 겁니까?”
“아! 막내는 보지 못해서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환국은 12개의 나라가 일종의 연방제와 같은 체제였다가 환인천제께서 환웅천황님께 종통을 이어주시면서 12국들은 각각 독립적인 나라로 존속된 것이지. 그런데 그 나라들 중 아직도 존재하는 나라가 있다니 나 역시 믿기지 않을 정도야.”
“그런데 동생, 세 나라만이 아닌 모양이야. 저기 보세나~”
28세 해모(奚牟)단군 18년에 천해지역을 비롯한 빙해(氷海: 시베리아 일대) 지역의 양운국, 구다천국을 비롯한 구막한국, 일군국, 비리국 등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공자께서 이상국(理想國)으로 삼았던 주나라도 조선을 대국으로 섬겼구먼.”
“요, 순 모두가 조선의 제후국이었는데 당연하지요.”
29세의 마휴(摩休)단군께서는 34년간 재위하셨고 재위 원년에는 주나라에서 공물을 바쳤다. 재위 8년, 9년에는 지진과 해일 등의 천재지변으로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30세 단군 내휴(柰休)천자께서는 즉위 원년에 배달국 치우 천황께서 일구었던 서토 경락의 도읍지 청구(靑邱: 산동성 일대)에서 천황의 공덕을 기려 비석에 새기셨고 서쪽에 이르러 주나라 국경을 마주한 엄독홀에서 삼조선의 모든 나라들의 왕을 모아 열병을 하신 후 제천(祭天)의식을 주재하셨다. 이때 주나라에서는 수교 사신을 보내 함께 참여하였다. 또한 재위 5년에는 서북방의 강국으로 성장한 흉노가 사절단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주변의 열국들도 화친을 맺고자 공물을 바치며 줄을 이었으며 그 후 나라별로 정례행사가 되었다.
“오라! ‘조선에 공물을 바친다’란 의미에서 조공(朝貢)말이 생겼구먼. 내조(來朝)나 입조(入朝)도 그렇고.”
“저도 왜 아침 ‘朝’가 왕조나 국가를 의미 하는가 했더니 바로 ‘朝’가 아사달(해가 뜨는 곳, 桓: 광명, 크다, 檀: 박달나무, 박달: 밝다 → 해)과 같은 의미임을 환국, 배달, 조선을 여행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저 역시 조공이란 중국을 기준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당시에는 나라다운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으니까요. 朝가 국가를 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당연히 그게 중국이었다고 알고 있는 것이지요.”
“하하~ 이 역시 중국에 빼앗겨 버린 단어일세~”
그 후에도 선비산(鮮卑山: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추장, 초나라 대부 등이 공물을 바치거나 입조하여 단군천자를 배알코자 했다.
감물(甘勿)천자께서 33세 단군으로 즉위하시어 재위 7년에는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 아래에 환인, 환웅, 단군왕검, 세 분의 성인을 모시는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그렇구나~”
첫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이세요, 작은 형님?”
“음, 우리나라 황해도 구월산에 고려시대 때 삼성사를 지었는데 이게 단군사당으로는 최초의 것이라 했는데 그보다 수천 년 앞서 여기에서 이미 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지.”
“동생, 왜 그런 기록이? 누가 그렇게 썼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역사가인 안정복입니다.”
“안정복 알지. 실학자인 그가 왜 그런 기록을 했을까? 여기에 세워졌다는 것을 모르고 한 것이겠지.”
“물론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학자이긴 하지만 그 실학도 어디까지나 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환인, 환웅, 단군. 이처럼 세 분을 모신 사당을 단군사당이라 표현한 것은 기존의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환인, 환웅은 부정하고 단군만을 역사로 인정하고 그것도 한반도 내의 역사로 국한시킨 것이지요.”
“흠, 삼성사를 단군사당으로 격하라……. 일리가 있구먼? 그런데 그것이 한반도 내의 역사로 국한시키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아, 예. 기자가 조선왕으로 봉해졌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기자와 단군을 동일시하여 그때부터 조선의 역사를 본 것이지요.”
“고려가 구월산에 삼성사를 지었다는 것은 고려도 스스로 단군을 한반도 기원설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요?”
막내가 내게 반문했다.
“시조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울 때 시조의 발원지에서 세울 수 없을 때는 내가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세워 기릴 수 있지 않는가? 식민주의 사학자들이나 사대주의 학자들의 의도적으로 이런 사실들을 왜곡하거나 그렇게 하고자 날조한 것 때문에 한국의 역사가 이처럼 비틀려 있는 것 아니겠나?”
“제가 이곳에 와서 보니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사이 23년간 재위하신 34세 오루문(奧婁門) 단군에 이어 35세 사벌(沙伐)단군께서 즉위하셨다. 즉위 50년이다.
“아니 저곳은 우리 일본 규슈인데~”
당시 일본은 수렵채취의 문화에서 농경시대로 정착되면서 여러 부족들이 난립되었다. 아직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일부 세력이 큰 몇몇 부족들 간의 정복과 통합 등의 세력다툼이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나라가 없는지라 삼도(三島)라고 불렀다.
천자께서는 규슈 지역에 부족들 간 분쟁이 심하여 죽거나 다치는 백성들이 많은지라 마한(막조선)의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평정토록 하여 미개한 그들에게 환인, 환웅, 왕검님의 사상으로 교화토록 하며 속지(屬地)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언파불합은 배달국 환웅천황의 황후 웅녀여왕님의 후손인지라 다스리는 지역을 웅 씨의 이름을 붙여 웅습(熊襲: くまそ)이라 하였다.
“사실 그곳에는 곰이 서식하지 않는 지역인데 왜 곰(熊)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막내는 구마모토(熊本), 구마시로(熊城), 구마가와(熊川)를 차례로 중얼거렸다.
“우리 일본에서는 저 시대를 야요이(やよい: 弥生) 시대라 부릅니다. 그 이전 수렵채취시대를 죠몬(じょうもん: 縄文) 시대라고 합니다만 야요이 시대 때부터 일본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 역사도 결국 동이 한(韓)족의 개척사였네~”
둘째의 말이다.
“맞습니다. 1948년 에가미 나미오(江上疲夫) 교수가 ‘북방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설’을 주장했는데 북방 기마민족이 바로 동이족이자 韓족이었습니다.”
56년이 지나서 36세 매륵(賣勒)단군 38년,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각 부족들 간 세력다툼과 특히 토착민들과 본조 마한에서 건너간 지배계층들에 대한 갈등이 심화되면서 어떤 부족은 왕을 참칭하면서 본조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매륵 천자께서는 막 조선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幋命)에게 병선 500척 군사 1만을 주어 평정토록 하셨다.
협야후 배반명은 규슈에서 동쪽 시코구를 거쳐 혼슈 야마토를 차례로 정벌하여 그해 12월 삼도(三島: 일본) 전역을 평정한 후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그가 일본 최초의 왕 진무(じんむ: 神武)이다.
“아- 진무왕이 실존 인물이구나!”
“무슨 소리인가?”
내가 물었다.
“진무왕이 실존 인물인가는 우리 일본 역사에서의 화두입니다. 조선의 단군신화와 같이 전설상의 인물이라고 하면서도 실존 인물로 믿고 싶어 하는 인물이지요. 오늘 실존 인물임을 확인하였습니다만 일본 신화에서처럼 하늘나라인 고천원(高天原: 다카마가하라)의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의 후손 이이예명(邇邇芸命: 니니기노미코토)이 아니라 조선 한족 배반명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하하, 고천원 즉 하늘나라는 바로 조선이었네.”
“그런 셈입니다.”
막내는 둘째의 말에 풀이 죽듯이 말했다.
“어차피 신화라는 것은 신격화의 과정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거지.”
“사실 저도 공부를 하면서 일본 신화가 단군신화와 유사한 점이 많아 조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만…….”
“그게 뭔가?”
“이이예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3개의 거울, 칼, 구슬이라는 보물을 가져왔다는 것이라든지, 자신이 지상에 내려온 곳 다카치호(高千穂)가 카라구니(한국: 천신의 고향)를 향하고 아침 해가 바로 쬐며 저녁 해가 비치는 매우 좋은 곳이라 했지요. 오늘에야 확실한 것을 알았습니다.”
“막내는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해야겠어.”
“그럴 수만 있다면 하여야겠지요? 아마 일본학계가 발칵 뒤집어질 겁니다.”
“형님, 큰 전쟁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둘째가 가리켰다.
재위 52년. 주나라의 제후국이었던 연(燕)나라가 강성하면서 자주 조선의 국경을 침략하므로 천자께서는 군사를 보내 번조선의 제후국인 수유국(須臾國: 기자가 세운 나라) 병력과 함께 연나라를 징벌하자 연나라는 제(齊)나라의 도움을 청했다.
제나라 환공(桓公)이 연나라를 구하고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으로 쳐들어 왔으나 조선군의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고는 전세가 불리하자 화친을 구걸하고 물러났다.
“그렇구나. 이 전쟁을 史記에서 환공이 산융(山戎: 조선을 비하한 별칭)과 전쟁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구나.”
둘째의 말을 받아 첫째가 말한다.
“신채호 선생께서는 진작 ‘단군조선과의 전쟁’이라 말씀하셨지.”
“사마천이가 ‘조선’이란 말을 쓰기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일세.”
“이 역시 춘추필법의 간교한 역사 왜곡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형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이 그럴 수밖에 없겠습니다. 동이족들이 서서히 세력이 약화되고 한(漢)족들이 중원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막내의 말처럼 주나라 왕실을 보전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을 내세운 제나라 환공은 주나라 제후들을 규합하여 조선에 집단 항거하였다.
주나라 제후국들과 대치하던 조선의 제후국 수(遂), 서(徐), 내(萊), 모(牟), 서(舒) 등 동이족 열국들이 잇달아 사라지고 조선의 영토는 많이 위축되었다.
그사이 매륵단군께서는 재위 58년에 붕어하시고 이어 37세 단군마물(麻勿: 재위 56년), 38세 다물(多勿: 재위 45년)단군, 39세 단군두홀(豆忽: 재위 36년), 40세 달음(達音: 재위 18년)단군, 41세 음차(音次: 재위 20년)단군, 42세 을우지(乙于支: 재위 10년)단군의 시대가 지났다.
43세 단군물리(勿理)께서 천자로 등극하셔 재위 36년에 서북쪽 융안의 부족장이던 우화충(于和冲)이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서북 36군을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천자께서 군사를 보내셨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그해 겨울에는 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천자께서는 좌우궁인과 더불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서압록(西鴨綠: 발해만으로 흐르는 강, 일명 句麗河)강을 따라 배를 타고 파천(播遷)하던 중 붕어하셨다. 천자의 갑작스런 붕어와 나라의 존망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 아무도 옥좌를 잇지 못했다.
도성이 함락될 무렵 백민성(白民城: 백두산 지역 일대)욕살 구물(丘勿)이 천자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開原)을 점령하고 동압록 서압록(압록강과 요하일대)의 18성에서 군사를 보내 원조하였다. 마침 3월에 도성이 홍수로 잠기게 되자 구물 욕살은 1만의 병사를 이끌고 토벌하니 반란군들은 힘없이 궤멸되었다. 마침내 우두머리 우화충을 잡아 참수하니 1년간에 걸친 반란은 종식되었다.
이에 구물이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아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비어 있던 옥좌를 이어받아 즉위하였으니 바로 44세 구물단군이시다.
단군께서는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고 색불루단군 이래 조정을 나누어 통치하던 형식적인 삼한체제를 대 단군의 지휘를 받되 권력을 분립하는 삼조선체제로 바꾸었다. 이와 동시에 특별히 각 조선에는 병권을 주어 독자적인 화전(和戰)의 권한을 갖게 하였으니 실질적인 국가연합체제가 된 셈이다.
“부여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는 것이군요. 부여의 역사도 분명 단군조선 역사와 함께하는 우리 민족의 중요한 역사의 한 과정인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동생 내가 아는 부여는 대부여가 아니라 주몽이 태어났다는 부여밖에 모르는데…….”
“저 역시 대부여는 몰랐습니다. 동부여 북부여 정도였지요.”
“남부여도 있습니다.”
막내가 첫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한다.
“그렇지 남부여도 있었지. 막내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야 일본고대사를 공부하다 보니 알게 되었지요.”
“남부여는 또 뭐지? 하기야 동부여, 북부여도 있었다니 남부여도 있겠지?”
“예, 백제가 한때는 국호를 남부여라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성왕 때 웅진(공주)에서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습니다.”
“호~ 백제가 남부여라! 그럼 우리나라 부여라는 지명도 그에서 유래되었구먼, 우리 역사에서 부여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었구먼. 나는 그저 조그만 부족국가로만 생각했는데.”
천자께서는 그동안 잦은 전란과 흉년으로 생활이 곤궁해진 백성들을 교화 위무하고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자 이듬해 3월 16일 몸소 대영절(大迎節)에 삼신을 떠받드는 영고(迎鼓)제를 올리셨다.
이와 함께 21일간 묘정에서 부족장 등 많은 백성을 차례로 모아 잔치를 벌려 백성들의 뜻을 듣고 아홉 개의 주제(孝, 友, 信, 忠, 遜:겸손, 知, 勇, 廉, 義)로 토론케 하니 소위 구서지회(九誓之會)이다.
이후 이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보급하여 가르치도록 하셨으니 곧 『부여구서(扶餘九誓)』이다.
천자께서 재위 29년에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余婁)께서 45세 단군이 되셨다.
여루 천자께서는 연나라 등 중화족 여러 나라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장령(長嶺: 난하지역) 낭산(狼山: 요령성 백랑산)에 성을 구축하셨고 재위 17년에 연나라가 침범하자 성주 묘장춘(苗長春: 백제 8대 성씨 묘씨의 선조)이가 이를 물리쳤다.
재위 32년에는 또 연(燕), 제(齊) 합동으로 쳐들어와 요서를 함락하고 운장(雲章: 화북성 천진)지방을 윽박지르니 번조선왕이 상장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고 진조선 막조선에서도 군사를 보내 협공하여 오도하(五道河: 하북성 하간현의 강)에서 크게 깨트리고 요서 지방을 회복하였다.
그 이듬해도 연나라는 연운도(連雲島)에 군사를 주둔시켜 배를 건조하는 등 침략을 준비하므로 우문언이 선제공격하여 장수를 죽이는 등 대파하였다.
재위 47년. 북막(北漠: 고비사막, 몽골 지역)의 추장 액니거길(厄尼車吉)이 내조(來朝)하여 말 2백 필을 바치며 함께 연을 공격하자고 하여 번조선 장수 신불사(申不私)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연나라 상곡(上谷: 화북성 회래현, 현 북경 지역 북부 일대)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성읍을 설치하였다.
상곡싸움 이후, 연은 상곡을 탈환코자 해마다 공격하며 천자 재위 54년에 강화를 요청하는지라 상곡일부를 돌려주고 조양(造陽: 북경 북쪽 만리장성 부근) 서쪽을 국경으로 삼으셨다.
이듬해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대 사면을 내리시고 친히 기우제를 지내신 후 병을 얻어 9월에 붕어하셨다.
태자 보을(普乙)께서 46세 단군의 옥좌를 이으셨다. 재위 원년 12월에는 번조선의 68세 왕 해인(解仁, 일명 山韓이라고도 함)이 연의 자객에 의해 시해되어 그 아들 水韓이 대를 이었으나 오가들의 권력다툼으로 내분된 틈을 타 연나라가 급습하여 수도 안촌홀(安寸忽: 고구려 때 안시성)을 공격하고 험독까지 쳐들어 왔다.
이때 번조선의 제후국 수유국의 기후(箕詡)가 5천의 날랜 병사를 이끌고 도우니 전세가 진정되었다. 이어 천자의 직할국 진조선에서 구원군을 보내 함께 협공하여 연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한편 일군의 군사를 보내 연나라 수도 계성(薊城: 지금의 북경) 남쪽을 공략하여 장수 진개(秦開)를 붙잡으니 연나라 소왕(昭王)은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공자를 인질로 보냈다.
천자 재위 19년 번조선의 69세 왕 수한이 후사 없이 죽자 기후가 조정의 정권을 잡아 군령을 대행하며 섭정하다가 스스로 번조선의 왕이 될 것을 천자께 청하니 천자께서 윤허하셨다.
기후는 70세 번조선왕으로 책봉되어 그 후손 5대에 걸쳐 129년간 번조선을 통치하였다.
“기자조선은 이를 두고 한 말이군. 그것도 副 단군에 불과한 번조선을…… 쯔쯔.”
“뿐만 아니라 주나라가 책봉 운운 했으니…….”
재위 46년에는 수유국의 한개(韓介)가 병사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니 천자께서는 잠시 몽진하였다가 43세 물리단군의 현손인 상장군 고열가(高列加)에 의해 진압되자 환도하시어 대사면을 내리셨으나 나라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하고 국력은 날로 약해지는 가운데 천자께서는 후사 없이 붕어하셨다.
한개의 반란을 진압했던 고열가가 백성의 사랑과 공경을 받던 지라 만조백관들이 추대하여 47세 단군으로 즉위하셨다. 천자께서는 어질고 인자하셨으나 우유부단하여 제후국이나 속국들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하셨다.
재위 57년에는 고리국의 사람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 하얼빈과 백두산 북부지역과의 사이 백악산)에서 거병하여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하며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재위 58년 3월 제천을 행한 날 저녁에 천자께서 오가와 더불어 의논하시며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성조들께서 처음으로 법도를 만들고 국통을 세워 후세에 전하셨노라. 덕을 심으심이 넓고도 멀리 미쳐 만세의 법이 되어왔느니라. 그러나 이제 왕도가 쇠미하여 모든 왕이 세력을 다투고 있도다. 짐이 덕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능히 다스릴 수 없고 이들을 불러 무마시킬 방도도 없으므로 백성이 서로 헤어져 흩어지고 있느니라. 너희 오가는 현인을 택하여 단군으로 천거하라.』
그러고는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를 석방시키신 후 이튿날 마침내 재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수도하며 여생을 보내셨다.
천자께서 재위를 버리시자 오가에서 6년간 공동으로 국사를 운영하였으나 해모수께서 진조선 단군의 국통을 이어받아 모든 제후와 장수들을 새로 봉하며 수유후 기비(箕丕)를 번조선 74세 왕으로 봉하셨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긴 했어도 국통은 이어지고 있음이야~”
“그래도 번조선이 위만에 의해 정권이 바뀌긴 했지만 조선이란 이름을 130년이나 더 유지했다는 것이 대견합니다.”
둘째가 내 말에 덧붙였다.
“정말 찬란하고 위대했던 역사였습니다. 형님, 이처럼 영광된 역사를 우리만이 알고 있다는 게 분통이 터집니다.”
“어쩌겠나. 그래도 우리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닌가? 연구들 많이 하고 있다니 아마 우리 후손들은 진실된 역사를 알게 될 것일세.”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말이 생각납니다.”
첫째가 뜬금없이 한 말이다.
“아베? 지금 일본 수상의 아버지? 아님 조부인가?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데?”
“현 수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만…… 막내는 이 사람을 아는가?”
첫째의 물음에 막내는 고개만 끄덕였다. (12부에서 계속)
“환국의 환인은 물론 배달의 환웅, 조선의 단군왕검까지 신화로 둔갑시켜 조선의 실제 역사가 반만 년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보다 짧은 겨우 2천 년의 역사로 만들고 싶었던 거지. 물론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내로 축소시키고자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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