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설 "하늘에서 역사기행"

하늘에서의 역사기행12(수정본)

둥지방 2017. 9. 30. 15:31

하늘에서의 역사기행12

- 단군의 국통을 잇는 부여

 

 

 

 

아베가 무슨 말을 했던가?”

정말이지 우리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 장담컨대 조선국민이 제정신을 차려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국민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흠 정말 자존심 상하는 말이네. 맥아더의 ‘I shall return’을 흉내 내는가?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는 그 말은 섬찟하구먼, 그래서 광복이 된 지 7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역사광복은 되지 못했나 보네.”

사실 일본은 계획적이고 지능적인 수법으로 우리 역사를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조선을 강점하면서 첫 번째 한 일이 민족의 제천단(祭天壇)인 원구단(圜丘壇)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서는 고등찰을통해 다음의 지시를 내렸습니다.

 

먼저 조선인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러므로 조선민족의 혼, 조선민족의 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되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모 조상들을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이 기풍이 되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갖게 하고,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하라. 그럴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帝國) 일본이 조선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이는 총독부 고등경찰 要史에 기록된 것입니다만 이게 어디 경찰에서만의 한 일이었겠습니까?

! 그렇게까지. 정말 치밀하고 지능적이군요. 그래도 큰 형님, 그 사람도 조선이 위대하고 찬란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둘째가 한 말이다.

막내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 동생이 물었다.

우리 일본이 식민지 교육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만 광복 70여 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인, 즉 한국인들의 책임이라 봅니다.”

그건 맞는 말일세. 단군조선을 부정한다거나 인정할지라도 한반도 이내의 부족국가로 전락시켜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끌어들이도록 했으니 말이야.”

그뿐이 아닙니다. 수백억의 국민세금으로 운영하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나온 역사지리서에 보면 독도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발간이 보류되기도 했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래?! 그건 문제가 있는데! 왜 그랬을까?”

그야 일본의 눈치를 본 거겠지요?”

내가 크게 놀라며 한 말에 둘째가 거들며 한 말이다.

일본의 눈치를 보다니?”

한국과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 문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저도 들어서 압니다. 영유권 문제는 현실적으로 심각한 쟁점이다 보니 슬쩍 비켜둔 것 아니겠습니까?”

영유권이라니? 독도가 우리 땅인데 무슨 소리인가? 설사 일본과 쟁점이 된다 할지라도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표시를 해야지. 그렇게 하라고 국민세금으로 연구시키고 있는 것인데.”

막내, 일본인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독도가 한국 땅인가 일본 땅인가?”

그야 한국 땅이지요. 웬만한 일본인들은 독도가 한국 땅임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다 해서 일본 땅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역사부도에 독도를 당당히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저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인 스스로가 국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 일본은 약간의 빌미만 있어도 일본의 것인 양 떼 아닌 떼를 쓰는데 말입니다. 이러니 우리 일본사람들이 독도가 일본 땅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희망이라니? 아베처럼 다시 오겠다는 뜻이구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아베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그 내용을 들어 관심이 있어 조사를 해봤더니 아베가 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럼 누가 했다는 말인가? 동생 어떻게 된 거지?”

첫째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인터넷에서 많이 돌고 있는 내용인데요. 어느 소설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소설가 이상각1910. 그들이 왔다라는 소설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소설속의 fiction에 불과합니다.”

그럼 작가가 지어낸 말이란 말이지. 소설의 그 말이 어떻게 진실인 양 포장되었지?”

그야 일본에 대한 편향된 의식에서 무조건 믿고 싶어서였겠지요. 그것도 일종의 피해의식이라 생각합니다만.”

내가 한 질문에 막내가 답하였다.

일리가 있구먼, 피해의식이라? 허허 우리가 아직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막내가 뼈 있는 말을 했네그려.”

인터넷에서 떠도는 유인물들, 특히 출처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가공된역사물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대중이 아닌 적어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접하는 역사 관련 자료에 대한 합리적 의심은 한 번쯤 해 보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라 봅니다.”

막내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이었다.

이런 뜬소문이 마치 사실인 양 떠돌면서 진실을 오도하고 거짓역사를 만들어 낸다면, 제아무리 많은 학자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진실을 밝혀낸다 할지라도 그 역사는 올바른 궤도에 올라설 수 없게 됩니다.”

바로 그거야.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거짓 역사 때문에 우리의 올바른 역사가 제자리를 못 찾고 있는 것이지.”

첫째가 말꼬리를 잡듯이 반격했다.

맞습니다. 우리 일본의 황도사관(皇道史觀)에 젖은 식민사학자들의 근원적인 잘못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편향된 의식을 갖고서 접근한다면 이 역시 새로운 거짓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歷史家가 역사를 평가한다는 자체가 주관성이 개입되지만, 그러나 주관과 편향은 다르다고 봅니다.”

막내가 역시 신세대답네.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야. 그래 뜬소문뜬소문으로 끝날 수 있도록 진실을 밝혀야 하고 진실이 밝혀지면 그 뜬소문을 믿은 것을 반성하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되는데 그 뜬소문을 만든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

불현듯 몇 년 전의 광우병 사태 때가 생각났다. 국 소를 먹으면 뇌가 스펀지처럼 구멍이 숭숭 난다던 뜬소문이 유언비어로 밝혀졌음에도 누구하나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간세상사가 거짓은 진실을 포장하고 진실은 거짓을 품는? (마침표 찍지 말아주세요)

큰 형님, 노부유키를 만나러 가보죠?”

둘째가 너스레 떨듯이 말했다.

뭘 그런 것까지 확인할 필요가 있나? 했으면 어떻고 안 했으면 어떤데? 그 사람의 말이 역사를 뒤집는 것도 아닌데, 가야 할 곳이 많아. 나는 부여가 우리 역사의 변두리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구먼. 부여를 좀 더 살펴 보세나. 자네들은 어떤가?”

그런데 형님. ‘부여란 말이 무슨 뜻인가요?”

막내가 첫째 동생에게 물었다.

“‘()’, ‘밝다(光明)’ 이런 의미일세.”

동생, 내가 알기로는 고주몽 아버지가 해모수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뵈었던 해모수 단군천자님은 주몽의 아버지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저도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분명 해모수 천제님은 주몽이란 아드님을 두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가 잘못된 기록인 것 같습니다.”

다시 확인해 볼 사안이네요. 지금 바로 가보시죠?”

막내가 재촉했다. 둘째도 어서 가보자고 했다.

 

해모수 천제께서는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이었고 신령한 자태를 갖추셔 사람을 압도하셨다. 단군 고열가 천자 재위 57년 해모수 천제께서는 웅심산(熊心山)에 터를 잡으셔 제실을 짓고 상제님을 받들며 국자랑의 지도자가 되셨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들 국자랑 낭도들은 그를 하늘의 뜻을 받드는 사람’, ‘상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천왕랑(天王郞)으로 불렀다. 마침내 그해 임술년 48일 대부여의 뜻을 잇고자 북부여 건국을 선포하셨다.

이때 연세가 23세였으니 머리에는 태양의 새라는 삼족오의 깃털을 꽂은 오우관(烏羽冠)을 쓰셨다. 허리에는 승천하는 용이 새겨진 금빛의 용광검(龍光劒)을 차고서 다섯 말이 이끄는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500명의 낭도를 거느린 채 나라를 돌보시니 백성들은 하늘에서 강림하신 상제님의 아드님이라 우러러 받들며 매년 48일이면 천제님을 기리고자 등을 달고 경축하였다.

사월초파일이 부처님 오신 날로만 알았는데 해모수님 기리는 날이었네……!”

부처님 오신 날이 48, 28일 두 가지 설로 맞서다가 1956년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열린 4차 불교대회에서 양력 515일을 세계 공통 불탄일로 정한바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도 고려 후기까지는 음력 2월에 연등회 겸 석가탄신일로 봉축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 막내의 설명에 첫째 동생이 덧붙여 설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4월 초파일 행사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되기 이전의 해모수님의 하강일의 축제와 서로 융합된 것일 수 있겠구먼.”

그렇겠지요. 불교가 유입되면서 우리 민족에서 전래된 토속 신앙이 불교화된 것이 많잖습니까? 삼신각이니 칠성각이니 하는 것들이…….”

토착신앙의 불교화가 아니라 불교의 토착화가 아닌가요? 우리 일본은 그렇습니다만.”

토착화냐? 불교화냐? 거 참, 연구해 볼 만하구먼…….”

재위 8년째 그동안 고열가 단군천자께서 재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신 이래 6년간 오가(五加)의 공화체제로 운영되던 대부여(단군조선) 조정에서는 공화제를 철폐하고 해모수 천제님을 단군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대부여는 북부여로 이양되면서 단군조선의 국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재위 19년에 번조선 왕 기비(箕丕)가 죽자 아들 준을 번조선왕으로 책봉하셨다.

한편 천제께서는 7(, , , , , , )으로 분할되어 패권을 다투고 있는 서토 중원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에 서토와 인접한 번조선의 국방태세를 점검코자 감독관을 파견하는 등 밤낮없이 노심초사하셨다. 이는 80년 전 보을 단군시절 번조선에 볼모로 잡혀 있던 연나라 장수 진개가 국방태세를 염탐 후 탈출하여 군대를 이끌고 침범하여 서쪽 변방 1천 여리의 영토가 유린당한 것에 교훈을 삼은 것이다.

재위 22년 서토의 중원에서는 마침내 진()에 의해 통일이 되니 한()나라의 망명객 장량(張良: 훗날 유방의 책사 장자방임)이 번조선에 진왕(진시황: 황제로 자칭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진왕이라 부른다.)의 암살을 위한 도움을 요청하여 창해역사 여홍성이 이끄는 자객단을 보내 박랑사(博浪沙: 현 신향시)에서 진왕 정()을 격살코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창해역사 여홍성은 관경을 지나면서 다음의 시를 남겼다.

 

이곳은 예로부터 번한이라 불렀는데, (村郊稱弁韓)

유별나게도 독특한 돌 하나 서 있구나. (別有殊常石)

받침은 허물어져 철쭉꽃만 붉게 피었네. (臺荒躑躅紅)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만 푸르구나. (字沒莓苔碧)

아득한 태고시절에 만들어지니 (生於副判初)

흥망의 역사 간직한 채 홀로 서 있구나. (立了興亡夕)

문헌으로 증명할 길 없지만 (文獻俱無徵)

이것이 단군왕검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此非檀氏跡)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mem000005a40003.t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20pixel, 세로 405pixel

동생들이 얘기하던 창해역사 사건이 바로 이 시기였구먼, 단순한 여홍성의 암살사건이 아니라 조선과 진의 전쟁이었네.”

화살에 고슴도치처럼 된 여홍성의 장렬한 최후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첫째 동생이 목이 잠긴 듯 말했다.

“120근의 철퇴를 휘두른 천하장사였지만 수천의 군사와 대적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암튼 창해역사의 괴력은 대단했습니다.”

수천의 호위군사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진왕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영웅호걸 시황(始皇)이 아니었습니다.”

막내의 말에 둘째가 이어 한 말이다.

재위 31년에는 진왕의 폭정에 반발하여 진승(陳勝)이 농민반란을 일으켜 6개월 만에 실패하였으나 이에 자극을 받아 전국적으로 곳곳에 반란이 일어나니 연, , , 망국의 백성들이 번조선으로 망명 유입한 자가 수만에 이르렀다.

재위 38년에는 한고조 유방으로부터 연의 왕으로 봉해진 노관(盧綰)이 요동의 옛 요새 계현(薊縣: 하북성 옥전현 서쪽 지역)을 정비하고 패수(浿水: 지금의 북경 동북쪽의 강 조백하(潮白河)이다.)를 동쪽 경계로 삼았다.

재위 45. 노관이 한나라의 여태후의 미움을 받아 숙청되자 흉노로 달아나고 그 부하인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번조선에 망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천제께서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조선왕 기준이 허락하고 박사로 삼아 변방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

이 해 겨울 천제께서는 68세로 붕어하시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태자 모수리(慕漱離)단군께서 등극하시어 아직 국정의 기반이 제대로 갖추기 전에 위만이 번조선 제후국 수유국에 머물던 준왕을 몰아내고 번조선을 가로챘다.

위만에게 권력을 찬탈 당한 번조선 지배계층 오가의 무리들은 상장 탁()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탁의 고향인 월지(月支: 오늘의 전북 익산)에서 월지국을 세웠다.

이에 앞서 진조선, 번조선 유민들이 이름뿐인 마한의 막조선 지역으로 이주하여 변한, 진한을 세워 연맹체를 이루던 중 신흥국 월지국을 중심으로 옛 마한의 정령(政令)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굳건한 삼한체제를 구축하였으니 소위 마한 또는 남삼한(南三韓)시대를 개창하였다.

우리가 배웠던 삼한이 바로 이 시대였구먼!”

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배운 삼한은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원시적인 부족연맹체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했다니? 도대체 국가체제가 어떤 것인데? 막내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소위 고대국가체제를 말하는데 통치구조 내지 조직의 구축, 율령 즉 법령에 의한 제도의 완비 등을 말합니다만, 물론 중국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만…….”

그럼 이 시대가 그 같은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건가? 그리고 반드시 중국식이어야 하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중국보다 앞선 국가체제를 갖추었는걸요, 그러나 이런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지요.”

자료가 왜 없어? 집현전의 그 많은 자료는 무엇이고?”

저는 집현전에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한일고대사 관련 공부를 하면서 자료부족을 실감하였습니다.”

그야 일본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없앴기 때문이지, 일제강점기 때 20만 권 이상 없앴던데?”

중국인 둘째가 실제 목격이라도 했듯이 불퉁스레 말했다.

“20만 권이나? 놀랍습니다. 그중에 삼국사기삼국유사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군요.”

그건 식민사학 구축에 유리하니까 남겨둔 거지. 삼국유사는 단군신화로 조작하기 위해, 모화 사대주의에 맞춰 쓴 삼국사기는 우리나라가 사대주의에 젖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거였지.”

첫째 역시 다분히 시비조로 말했다.

삼국사기가 모화주의에 근거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서술체제는 매우 자주적인 것으로 아는데요?”

자주적이었다고?”

나와 첫째가 동시에 말했다.

그렇습니다. 삼국사기서술 체제를 보면 사마천의 사기와 마찬가지로 기전체(紀傳體) 형식입니다. 기전체란 계급을 구분하여 기록하는 것으로 표(), 本紀, 世家, 列傳으로 나누었는데 표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입니다.”

- 그렇구나. 삼국지에서 읽은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가 생각나네.”

~! 출사표로는 제갈량의 출사표가 가장 유명하지요. 구구절절한 충정어린 내용은 물론 문장도 명문인지라 우리 중국에서는 학생들이 외우다시피 합니다. 선제(유비)께서 왕업을 시작하신 지 아직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중도에서 돌아가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 익주(益州)는 오랜 싸움으로 지쳐 있으니……(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 疲弊……).”

첫째의 말에 맞장구를 친 둘째는 출사표를 줄줄 외울 기세였으나 막내의 이어지는 설명에 멈췄다.

때문에 삼국사기의 표문에는 인종에게 성상폐하라는 황제존칭을 사용하였고, 기 역시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황제의 나라였기에 각각 본기에 서술하였습니다. 세가는 봉군() 또는 제후의 기록인데 삼국은 중국과 달리 왕이나 제후가 없었기에 생략하고 열전으로 넘어갔습니다.”

김부식은 철저한 사대주의자로만 생각했는데……. 동생은 어떻게 생각해?”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막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 김부식을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느낌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삼국사기기 기록 불신론때문에 더욱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된 것 같습니다.”

기 기록 불신론은 또 뭔가?”

막내는 들어 봤는가?”

첫째가 막내에게 되물었다.

좀은 알고 있습니다만, 형님께서 먼저 말씀해 보시죠?”

조선사편수회의 스다소우키치가 주장한 것으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 초기 왕들의 존재도 부정하였습니다. 삼국의 초기 왕을 모두 누락시키고 고구려는 6세 태조왕, 백제는 8세 고이왕, 신라는 17세 내물왕부터 왕의 이름을 거론하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국가가 아니었다는 셈이지요. 삼국사기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가 각각 기원전 57, 37, 18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만 그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했어요?”

중국인 둘째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첫째가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건 임나일본부설때문입니다. 일본의 임나라는 나라가 4세기경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인데 삼국사기이 초기 기록을 인정하게 되면 4세기 이전에 한반도에 강력한 왕권이 있었던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임나가 한반도에 진출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 이지요. 해서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임나가 가야를 근거로 신라에 당도했다라는 명백한 사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임나라는 용어가 없어 신라본기초기에 보이는 외국관계나 영토에 관한 기사는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막내가 첫째의 설명에 부연하였다.

저런 생떼가 있나? 일본기록에 임나가 있는가?”

있긴 합니다만 일본학자들도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많이 품고 있습니다. 720년 도네리친(舍人親)왕 때 지은 일본에 물론 이것도 위서(僞書)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임나는 츠쿠시국(筑柴國: 규수 후쿠오카)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신라)의 서남방에 있다라고 했는데 이는 대마도를 지칭한 것으로 봅니다. 저도 한일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한국 측의 자료에서는 임나와 관련된 자료를 찾지 못했는데 이는 한반도에 임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가 없는 것이라 봅니다.”

그렇지, 막내도 봤지만 진조선이나 번조선인들이 그곳을 개척하고 일본국의 전초 기반이 된 곳이었지.”

~ 스다소우키치가 삼국사기를 고의적으로 왜곡하면서 김부식을 폄하하기 위해 김부식의 사대주의를 과장하여 부각시켰구먼, 거기에 우리 역사학자들도 동조 또는 묵인한 거고…….”

그사이 모수리 천제께서는 상장 연타발(延佗勃: 고구려의 개국공신 연타발과 동명이인)을 평양(지금의 만주 요령성)에 보내 성책을 세워 위만을 대비케 하였다. 또한 재위3년에는 수도와 지방을 나누어 지키는 법(京鄕分守之法)을 제정하여 수도는 천제가 직접 군사를 통괄지휘하며 지방은 4구역으로 나눠 오가들이 담당케 하였다.

재위 25년 천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高奚斯)께서 즉위하셨다. 이때 해모수 천제 45년에 위만이 번조선을 침탈하기 직전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바다 건너 마한의 왕검성에서 나라를 세웠던 낙랑왕 최승이 곡식 300석을 바쳤다.

재위 42년에 위만이 침략하자 천제께서 친히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남려성에서 싸워 크게 이기니 그 후로는 위만이 침략치 못했다.

재위 49, 환국의 12분국이었던 일군국에서 천제의 안녕을 기원하며 사절을 보내고 방물을 바쳤으나 그해 9월 천제께서는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高于婁)께서 4세 단군천제로 즉위하셨다.

고우루 천제께서 즉위 원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토록 했으나 이기지 못하여 조부 모수리 단군님의 아우님이신 고진(高辰: 해모수의 둘째 아들)으로 하여금 서압록(지금의 요하)을 지키게 하여 많은 공을 세운지라 고구려후()로 삼으셨다.

그러나 재위 3년부터는 위만의 손자 우거의 무리들이 대거 침략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을 약탈당하고 점령되었다. 이듬해 장수를 보내 해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자 재위 6년에는 천제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해성을 공략하여 살수(薩水: 지금의 요령성 개평현 州南河)까지 영토를 넓혔으니 구려하(九黎河: 지금의 요하일대) 동쪽이 모두 복속되었다.

재위 13년에는 한나라 유철(劉徹: 무제의 본명)이 위만조선(번조선)의 수도 평나(平那: 옛 왕험성이며 지금의 창려)를 공격하여 힘겹게 우거를 멸하고서 그 일대에 4군을 설치코자 대량의 군사를 사방으로 보냈으나 졸본에서 동명국(東明國)을 건국한 동명왕 고두막한(조선의 마지막 단군천자 고열가의 후손)이 유민들과 함께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유철의 군대를 격파하니 유철은 성과 없이 물러났다.

이를 계기로 동명왕은 백성들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그 위세가 날로 커지더니 천제님의 재위 34,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나는 천제의 아들이로다. 장차 이곳에 도읍하고자 하니 왕께서는 떠나시오.’ 하며 천제님을 급박하였다. 천제님은 근심 걱정으로 심히 괴로워하시다 마침내 병환으로 붕어하시고 아우 해부루가 단군이 되셨다. 그러나 동명왕이 계속적으로 압박하므로 국상 아란불의 주청에 따라 이에 가섭원(迦葉原: 만주지역 흑룡강성 통하현)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가섭원 부여 또는 동부여로 불리었다.

동명왕 고두막한 천제께서는 수만의 무리를 이끌며 북치고 나팔 부는 악대를 앞세우고 백성들의 환호 속에 도성에 입성하여 북부여의 국통을 그대로 이어 받아 5세 단군이 되셨으니 동명국을 세운 지 23년째이다.

천제께서는 국명을 북부여로 하시면서 배달 조선국의 정통을 계승했음을 만천하에 공포하셨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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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한왕(무제)이 사망하고 8세의 어린 아이가 왕(昭帝)이 되어 왕권 기반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서압록(요하에 있는 강이며 한반도의 압록강이 아님) 지역으로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 크게 승리하여 서압록강을 영토로 편입시켰다.

천제께서는 동명왕 재위 49년 단군천제 재위 27년 만에 붕어하시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서 장사를 지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께서 6세 단군으로 즉위하셨다.

동생, 내가 배우기로는 동명성왕 고주몽이라 하여 동명왕과 주몽이 같은 사람으로 알았는데 여기서 보니 전혀 다른 사람 같은데 어떻게 된 거지?”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만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의문을 가졌는데 여기서 별개의 인물임이 확인한 셈입니다. 사실 삼국사기에 같은 인물로 기록하였습니다만 조선 연산군 때 김천령(金千齡)이라는 문인이 쓴 부()에 보면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東明創其緖業 朱蒙承其餘疲)’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임을 주장했는데 사실인 셈입니다. 동명이 창업하였다는 것은 고두막한 천제가 동명국을 세우고 동명왕이라 불린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시피 동명이라는 용어가 우두머리나 군장을 뜻하는 칭호로 사용되는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부식이가 착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먼.”

이즈음, 고두막한 천제로부터 강봉(降封)되어 가섭원(迦葉原)으로 천도한 해부루 임금께서는 땅을 개간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게 보살피시니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라가 번창해지고 백성들이 번성하였다.

재위 8년 임금께서는 압록강(지금의 송화강) 쪽으로 순행을 하던 중 하백(河伯: 물을 관장하는 직책)의 따님이신 유화(柳花)를 만나 궁으로 데려와 왕후로 삼으셨다. 이에 앞서 유화는 부모 몰래 부여의 황손 고모수와 사랑을 나누던 중 고모수가 갑자기 죽게 되자 고모수를 그리워하며 장탄식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해 오월 유화가 귀티가 나는 늠름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고주몽님이시다. 해모수천제의 4대 후손이다.

재위 10년 어느 하루, 대를 이을 아드님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곤연(鯤淵: 지금의 흑룡강 성 영안현 일대)에 이르렀을 때 왕이 탄 말이 큰 돌덩이 앞에서 눈물을 짓는지, 괴이하게 여겨 그 돌덩이를 굴려 보니 황금색의 비단 강보에 갓난아이가 개구리가 엎어져 있는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임금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하늘이 과인에게 대를 이을 아이를 주셨다며 금와(金蛙)라는 이름을 짓고 거두어 길렀다. 금와 왕자는 장성하여 태자가 되어 동부여의 2세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만나 주몽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듯 했다.

나도 몇 년 전 TV 드라마에서 금와왕과 유화부인의 사랑 얘기를 본 적이 있네만 고증이 잘못된 것이었구먼그래.”

큰 형님께서는 드라마를 역사로 보셨습니다. 저도 어릴 때 본 역사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게 역사인 줄 알았습니다.”

일본인 막내가 내 말을 거들었다.

나는 삼국지 드라마를 보면서 공명이 진짜 동남풍을 불게 하는 줄 알았던 걸요.”

둘째 역시 한 마디 거들었다.

고무서단군께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시고 요하 동쪽에 잦은 침입으로 분란을 일으키던 한나라의 군대를 물리쳐 요동을 안정시켜 해모수라 불리었다. 그러나 재위 2, 전국을 순행하신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평소 천제께서는 동부여에서 망명한 고주몽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고 공주 소서노와 혼인시켜 가까이 두며 국사의 중책을 맡기셨다. 대를 이을 태자가 없던 천제께서 붕어하실 때 주몽에게 대통을 받도록 유언하시니 주몽께서 유명을 받들어 즉위하셨다.

내가 알기로는 주몽이 해모수의 아드님이신 줄 알았는데.”

시대가 무려 18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해모수님은 주몽의 고조부인 셈입니다. 그렇구나! 고구려가 700년 역사가 아니라 900년 역사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는 탄성을 지르며 엄지를 세웠다.

무슨 소리야?

보다싶이 해모수님이 나라를 세운 곳이 구려입니다. 때문에 주몽께서도 해모수님의 나라를 계승하는 뜻에서 국호를 고구려라 한 것입니다. “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도 고구려는 900년이라고 배웠어요. 당나라때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고구려는 900년을 넘지못하고 80먹은 당의 장수에게 망한다라고 했거던요. 그 말대로 80살의 장군 이적(李勣)에게 망했잖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우린 그렇게 배운 거지?”

그게 바로 잃어버린 북부여의 역사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해모수만 배웠지 해모수 이후 2세 모수리 천제님, 3세 고해사 천제님, 4세 고우루 천제님, 5세 고두막 천제님, 그리고 마지막 천제님이신 고무서 천제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역사였지요. 이런 사실을 모르는 김부식은 가언충의 말은 잘못된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역사가 있음에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기록조차 없었다는 것인가?”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광개토대왕님의 비문에 시조 추모왕께서는…… 북부여에서 유래한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 외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북부여, 동부여, 부여 등 단편적으로 언급되긴 했으나 그 내용이 부실하고 체계성이 떨어져 부여사의 전모를 알 수 없습니다. ! 그러고 보니 고려 말의 문신이자 두문동 72인 중의 한 분이었던 복애(伏崖) 범장(范樟)이라는 학자가 쓴 북부여기가 있었다는데 보진 못했습니다.”

그 책도 징발 압수당했던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그 책이 북부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썼겠지요. 암튼 북부여 이외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해부루의 손자들이 세운 갈사부여, 서부여(연나부 부여) 등의 기록이 중국 사료나 국내 사료에 간단히 보이긴 합니다만…….”

이즈음에 동부여 해부루 임금께서는 재위 39년에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여 41년간 재위하였다.

금와왕 재위 24년에는 부친의 왕후였던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고구려에서 수만 명의 호위병을 보내 영구를 졸본으로 모셔가서 황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금와왕이 붕어하시고 태자 대소가 즉위하여 28년간 재위하였다. 재위 원년 10월에는 임금께서 직접 5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졸본성을 공략하였으나 큰 눈이 오고 추운 날씨 때문에 많은 군사들이 죽게 되자 물러났다.

재위 19년에도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학반령 계곡에서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재위 28년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왕께서 몸소 군사를 이끌고 싸우다 고구려 상장 괴유(怪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동부여는 3세 대소에 이르러 64년간의 국통을 마감하였다.

대소임금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죽자 그의 동생이 백성을 이끌고 갈사수(葛思水: 동만주의 우루리 강)로 옮겨 갈사국(일명 갈사부여)을 세웠으나 그 손자인 도두왕이 날로 강성해지는 고구려에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으니 47년간의 갈사국이 운명을 다했다.

갈사부여가 건국될 무렵 7월 대소임금의 종제(從弟)가 옛 도읍의 백성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연나부(椽那部)왕으로 봉하고 낙(: 씨의 원조로 추정) 씨의 성을 내려 연나부를 다스리도록 했다.

그 후 점차 자립하여 6세 의려(依慮)왕 때 백랑산(白狼山: 지금의 대양산)으로 옮겨 터를 잡아 부여의 국통을 잇고자 연나부 부여 또는 서부여의 국명으로 부활하였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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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90pixel, 세로 339pixel

 

그러나 의령왕은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아들에게 나라를 양위한 후 바다를 건너 왜를 평정하고 왕이 되었으니, 곧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 야마토’(大和)이며 응신(應神)왕이다.

우리 일본에서는 최초 천황 응신에 대해서 가공인물이니 백제의 근구수왕의 동생이니 등 여러 가지의 설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서부여의 의려왕이었습니다.”

둘째가 막내의 말을 받아 한마디 한다.

일본의 왕조는 결국 조선인들 간의 권력쟁투의 잔치 마당이었네그려.”

 

서부여는 그후로도 200여 년간 나라를 유지타가 고구려 21세 문자열제(文咨㤠帝) 때 나라를 바쳐 500년간의 역사를 마감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부여가 빠진 토막토막 도막난 역사를 배운 셈이구먼, 부여는 우리 민족사의 잘려진 연결고리였어.” (13부에서 계속)

 

 

~삼국사기에 같은 인물로 기록하였습니다만 조선 연산군 때 김천령(金千齡)이라는 문인이 쓴 부()에 보면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東明創其緖業 朱蒙承其餘疲)’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임을 주장했는데 사실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