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성
백제의 수도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부여 또는 공주라고 하거나 그중 일부가 위례성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위례성을 말하는 사람 중에서도 위례성이 어디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실 7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온 백제 역사 중 공주나 부여를 수도로 삼은 기간은 185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500년간의 백제수도는 어디일까? 물론 위례성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례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가 하남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웠다는 정도이다.
그러면 위레성은 어디이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삼국사기에 ‘북으로는 한수를 끼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남으로는 비옥한 뜰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에 접한 곳’이 위례성이라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역사학계에서는 갑론을박하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3만 대군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폐허가 되면서 위례성은 그 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1960년대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서 발견된 토성의 흔적이 사라진 위례성일 줄은 30여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위례성이 잿더미가 되고 1500여년이 흐른 1997년 토성부근에서 재건축하던 현장에서 엄청난 백제유물이 쏟아져 나옴으로서 풍납토성이 바로 위례성임을 알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분석해본 결과 풍납토성은 백제사 500년의 수수께끼를 한꺼번에 풀 수 있음은 물론 우리 고대사의 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간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까지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지만 풍납토성의 규모는 부여의 사비성이나 공주의 웅진성을 압도할 정도다. 풍납토성은 인근에 몽촌토성을 비롯하여 한강북쪽의 아차산성, 한강 이남의 평야지대를 지키던 二聖山城등의 보조 防圍城을 거느린 9m높이의 약 4km의 성벽과 너비 74만㎡의 규모의 성이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기법인 판축기법版築技法과 부엽공법敷葉工法(댓글 참조)으로 성의 규모에 견주어 계산해본 결과 성축에 소요된 흙이 무려 150만톤, 연인원 100만 명 이상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백제가 대단한 국력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은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지역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국제해상 무역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중국내륙까지 진출하여 중국의 곳곳에 백제라는 이름을 남기게 한 고대백제의 왕성이었던 것이다.
※판축기법: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틀을 대고, 그 안에 고운 흙을 반죽해 부어넣은 뒤, 마치 벽돌을 찍듯 한 층 한 층 다진 후 그 옆으로 몇겹의 점토를 덧대는 방법. 이는 요즘의 콘크리트와 비슷한 효과를 낸다. 부엽공법; 갯벌층 등 지반이 약한 곳에 취약성을 보강하기위해 완충제로 나뭇가지나 잎 등의 식물유기체를 10㎝정도 높이로 깔고 갯벌 흙을 덮는다. 이를 번갈아 함으로써 튼튼하게 토층을 쌓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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