鮑石亭? 砲石祠?
鮑石亭은 왕들의 놀이터로, 나아가서는 신라 멸망의 상징으로 천년의 역사가 막을 내린 비운의 현장으로 회자되며 기록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55대 경애왕은 이곳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되어있다.
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사실이나 과연 적이 침입하는 줄도 모르고 연회를 즐겼을까?
우선 시기적으로 음력11월이면 한겨울일터 그 추위를 무릅쓰고 연회를 즐겼을까? 그것도 불과 25km 거리에서 시시각각 적이 오고있는 상황에 방탕한 연회를...
혹시 후백제 견훤이 공격한다는 소식에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 경애왕은 국가 사당인 砲石祠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달라고 제를 올린 것은 아닐까?
1998년 포석정주변에서 여러 가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砲石』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는 포석정의 형태가 전복같다는 뜻에서 鮑(전복)石亭이라 했지만 원래는 砲石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진위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김대문의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김유신이 삼한 통합에 큰 공을 세운 문노의 화상을 鮑石祠에 모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보아 포석정은 단순한 연회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연회장이라면 안압지와 임해전처럼 많은 연회와 관련된 놀이기구들이 발견되어야함에도 포석정주변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발견된 적이 없다.
그리고 헌강왕이 포석정에 방문했을 때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으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본다면 포석정은 산신이 언급될 수 있는 신성한 곳일 것이다. 또한 포석정 주변은 오능, 계림, 나정을 비롯한 소위 신라에서는 聖地로 여기는 지역이다. 이런 성지에서 방탕한 연회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없다.
김부식은 신라의 멸망을 폄훼하기위해 그 같이 기록하지 않았나 생각해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포석정이 어떤 규모였으며, 어떤 목적의 건물이었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원래 신성한 곳이었으며 경애왕은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때에 이 신성한 지역 즉 砲石祠에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제사를 지내러 왔다가 견훤의 급습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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