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 새겨 보는 우리역사, 우리문화

삼국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

둥지방 2015. 3. 25. 15:22

삼국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

 

충북 보은군 어암리 한 복판 해발 325m의 오정산 정상에 삼년산성(사적 235호)이 있다.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년)때 3년에 걸쳐 축성하였다해서 삼년성이란 이름이 붙은 산성이다.

길이 1680m, 높이 13~20m, 폭 8m(말 두필이 교차할 정도이다)의 규모의 이 산성은 신라축성술의 총집합체라 할 정도로 견고성은 물론이요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정교한 방어막을 형성한 성이다.

일일이 손으로 다듬은 판석형 석재를 그냥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정밀한 수평을 유지한 채 우물 井자형으로 가로 세로 엇물려 쌓아 성벽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도록 했다.

1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여니 성과 달리 외벽과 내벽사이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있어 성벽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그물처럼 얽혀있다.

성 축조에 소요된 돌이 8톤트럭 25,000대분이라니 그 당시로서는 국력을 기울린 대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리고 성 안은 5,6개의 우물과 논밭 그리고 연못까지 있어 식량과 물의 자급체제를 갖춘 완벽한 전략기지였던 곳이다.

4개의 성문을 지형에 맞게 각각 다른 구조로 되어있어 쉽게 적들이 성문을 공략할 수 없도록 하였다. 적군이 성문을 공격하기위해 높은 성벽을 기어오르면 다시 성문이 가로 막는 형태의 옹성, 계곡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양면에서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는 반 원통형의 곡성, 바깥쪽으로만 열리도록 한 성문, 설령 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대로 연못에 빠지도록 된 구조,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지다.

성을 축조할 무렵 신라는 삼국 중 가장 약체의 나라였으나 국가 생존을 도모할 뿐아니라 우위의 국가경쟁력을 갖추고자 전 국력을 동원하여 이 성을 쌓았다.

또한 이성을 유지하기위해 신라에서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을 뿐아니라 경북 선산, 충북 단양 등의 인근주민을 동원 할 정도로 최대의 공력을 부었다.

그 결과로 한 반도의 중원지방은 물론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서해로 진출하며 나아가서는 삼국통일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성에서 4km 떨어진 곳에 백제의 동쪽끝성 한민산성이 있으며 그 사이 너른 들은 신라 백제 양국의 교전지로서 하루가 멀다하고 접전이 되던 곳으로 삼년산성은 말 그대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백제는 이 성을 탈취하기위해 심혈을 기울렸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심지어 백제 성왕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관산성에서 목숨까지 잃고만다.

김유신은 이성에서 5만의 정병을 훈련시켜 황산벌로 진군하였으며 견훤은 이곳에 주둔하여 왕건과의 한판 전투에서 승리를 한 곳이기도 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년성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구축함으로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