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의 역사기행6
- 천하 우두머리 치우천황
“형씨, 사기를 읽으려면 어디로 가는 게 좋겠소? 이왕이면 원본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원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중국 25史의 첫 사서이면서 표준으로 삼는 지라 원본이나 후세 간행본이 내용이 같기 때문에 원본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구먼, 그럼 형씨가 안내 해봐요.”
중국인 친구가 안내한 곳은 그가 다녔다는 북경대학 도서관이었다. 옛 문헌이나 자료를 별도로 보관하는 서고 중 특별실이다.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의 명저로 불리는 사기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고서의 특유한 냄새가 풍겼다.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총 130권이다.
“본기 앞부분에 있을 것입니다.”
“어찌 그리 잘 아시는가?”
“중국역사의 시작이 거기서 출발하니까요, 본기는 중국에서 역사과목의 필수입니다.”
과연 본기 첫 장을 넘기니 ‘오제본기’편에 바로 치우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 黃帝 乃徵師諸侯 與蚩尤 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형씨 읽어보시죠?”
‘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이 소용없었다. 이에 황제가 군사를 징발하고 제후를 모아 치우와 탁록의 들에서 싸워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납니다. 학생 시절 동양사를 배울 때 이 대목을 본 것 같습니다. 그때는 ‘치우’라는 도적이나 반란군 우두머리로 배웠는데 그 치우가 배달국의 치우천황이었군요! 지난번 열여덟 환웅님들을 뵈올 때만 해도 깨치지 못했는데...”
“동생도 천황을 반란군으로 배웠네 그래, 하기야 교수들도 배달국이라는 나라자체를 몰랐을 테니까. 그런데 황제라는 사람이 누군가? 내가 알기로는 진시황제가 황제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아는데.”
중국인 친구가 대답한다.
“그 황제가 아닙니다. 한자가 다르지요. 시황제의 황은 임금皇이고 여기의 ‘황’은 중앙이나 금을 뜻하는 ‘黃’이며 ‘황제’는 후세에 붙여준 존칭입니다.”
“존칭이라?”
“조선의 단군과 같은 전설적인 인물입니다만 우리 중화민족의 시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본래 성은 공손(公孫)이고 헌원(軒轅)이란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헌원씨라고도 부릅니다.
신화와 전설에 따르면 소전(少典)의 부인 부옥(附玉)이 야외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천둥과 번개가 북두칠성을 감싸는 것을 보고 감응을 받아 임신한 다음 24개월 만에 황제를 낳았다고 하지요. 황제는 태어나자마자 남다른 용모를 보였는데, 태양 같은 이마에 눈썹 언저리는 용뼈와 같았다고 하며 몇 달 되지 않아 말을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성장하여 남다른 병법과 통치모략을 지닌 말 그대로 지혜와 용기, 문과 무를 두루 갖추어 훗날 중원 각 부족연맹의 통합 수령이 되었습니다.
또한 수레와 배, 궁실, 문자, 음률, 역법, 관직 등 여러 문명을 발명·창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인양 또박 또박 진지하게 설명하였다.
“오, 중국의 시조로 떠받들 만하구먼.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중국에 여행했을 때 헌언황제의 조각상이 있는 사당을 본 적이 있어”
“곳곳에 많이 있지요. 과거엔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만 근래 들어 실존 인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생 우리나라는 단군을 아직도 신화적 인물로 생각하여 단군상하나 제대로 없는데 너무 대조적이구먼, 도대체 역사학자들이 뭘 하고 있나?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너무 없는 것 같아.”
“역사학자들도 문제지만 정부의 인식이나 의지도 문제가 많아요, 몇 년전 각 학교에 단군상을 세우려다 특정 종교단체의 우상건립이라는 반발에 취소한 적 있지 않습니까? 정부가 확고한 인식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 아닙니까?”
“맞는 말이야, 그러나 그 종교집단이나 정부당국에 우상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임을 인식시킬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역사학자들이 아닐까? 자칭 역사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이 스스로가 확신을 못하고 있는데 정부인들 의지가 나올까? 다른 나라는 없는 역사도 만드는 판국인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제대로 보듬지 못하고 있잖는가?”
“그렇네요, 지금 보니 보듬기는커녕 빼앗기고 있습니다.”
“동생이 환생하여 해보게나,”
“그래 볼까요?”
“ 가만, 그 때 헌원상 좌우에 하나씩 2개의 상이 더 있었는데, 하나는 머리에 뿔 비슷한 것이 있었거던”
“그 사람이 치우천황입니다. 나머지는 농사의 신이고 불의 신인 염제신농씨입니다.”
“맞았어, 가이드가 그렇게 설명한 것 같아. 그런데 치우천황은 반란군 수괴라 잡아서 죽였다고 했는데 이민족 그것도 오랑캐라며 멸시하는 동이족의 반란군 우두머리를 함께 모시고 있지?”
“사실 90년 후반부터 갑자기 中華三祖堂이라하여 치우천황도 우리 중화족의 시조로 함께 받들고 있습니다. 수 천년동안 중화인들이 신묘한 병법의 군신으로 숭앙숭배하고 있으며 오늘날 묘족인 그 후손들이 중국 곳곳에 소수민족을 형성하고 있다 보니, 치우천황도 중화족으로 편입시킨 거라 할까요.”
“이 역시 동북공정의 과정인가? 우리역사가 또 하나 강탈당하였구나!”
“치우를 군신으로 숭앙한다고?”
“그렇습니다. 이 책 ‘봉선서(封禪書)’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만 진시황 때 八神祭가 있는데 그 팔신 중 하나가 兵主神 즉 군신 이 치우입니다. 치우를 모시는 사당도 곳곳에 있습니다. 한고조 유방을 비롯한 역대 제왕들은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관례입지요.”
“허허 군신으로 받들어지는 치우 천황님이 헌원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형님 날조된 역사현장으로 다시 가보시죠?”
치우천황께서 즉위하신지 수 십년이 지났다.
신시 개천이래 1,0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들은 팽창하였다.
신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려, 홍산 일대에서 질 좋은 구리와 주석이 많이 채굴되어 이를 이용한 청동제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농기구를 비롯한 병장기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를 즈음 기후의 변화로 점차 추워지자 백성들이 농작물재배나 가축을 기르는데 어려움이 많게 되어 천황께서는 날씨가 비교적 따뜻한 서남쪽 황화북쪽으로 진출하여 청구라는 임시 도읍지를 정했다.
도읍을 옮긴 후 西土의 中原을 경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일대는 염제 신농씨의 중화족이 이미 진출하여 근거지로 삼고 있는 터라 이들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자 군대를 준비하고 갈로산(葛盧山)과 옹호산(雍狐山)의 쇠를 캐어 성능이 뛰어난 칼과 예과(芮戈)와 옹혹극(雍狐戟) 창을 만들고 방패 투구 등 개인 방호장비를 대량 생산하였다.
특히 한꺼번에 여러 활을 쏠 수 있는 쇠뇌(大努)를 만들어 별도의 병단을 조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씨름 등 병사들의 각개전투기술을 개발하였으며 군사를 움직이는 각종 전법을 개발하여 마침내 남방으로 출정하여 오늘의 산동반도 부근에 도읍을 정하여 ‘청구’라 이름한 후 본격적인 서토경략에 나섰다.
천황께서는 일흔이 넘은 나이이도 불구하고 청동 갑옷에 쇠뿔모양을 한 붉은 쇠투구를 썼으며 8척의 언월도를 지참하였다.
천황께서는 신출기묘한 병법과 전법으로 신농씨의 12제후들을 차례로 정벌하였고 마침내 신농씨의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항복하였다.
이즘에 토착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황제헌원은 신농씨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며 천황에 대항하였다.
헌원역시 우두머리답게 수례위 목상의 손가락이 항상 남쪽을 가르키는 지남거(指南車) 발명 등 지략과 병법이 뛰어나 탁록일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10년간 대항하였다.
청동 갑옷과 투구에 언월도로 무장한 천황의 위용은 화족들에게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쇠뿔모양의 투구 때문에 천황이 나타나면 쇠머리(우두머리)가 출현했다며 도망가기 바빴다.
73차례나 치열한 공방끝에 마침내 헌원은 천황에게 사로잡혀 배달국의 제후국으로 충성을 맹세하였다.
천황께서 붕어하자 도읍지인 청구에 안장하고 애장품등을 천황께서 경략했던 각지에 보내 사당과 묘를 만들어 백성들이 추모토록 하였다.
“아!~ 형님, 전투가 저렇게 치열했다니. 영화에서 본 것 보다 더 처참하군요. 아직도 전율이 느껴집니다.”
“전쟁에는 휴머니즘이 없는 법일세. 영화속의 전쟁은 오락이고 거기에는 휴머니즘이 삽입되지만 현실의 전쟁에서는 승리가 곧 휴머니즘일세”
“승리가 휴머니즘이라구요? 이긴자가 정의라는 말은 들어 봤습니다만,”
“동생, 죽은 뒤에 휴머니즘이 뭔 소용인가?”
“그러기에 전쟁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인류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잖습니까?”
“형씨, 전쟁이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시오?”
내가 되 물었다.
“그야 인간의 본성 때문이겠지요, 이런 말도 있잖습니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저는 욕망때문이라 보는데요, 명예,부귀영화 등등,”
“욕망도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신령님도 그런 말을 한 것 같아,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 했으니 형씨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도 존재할 수밖에 없구먼.”
“전쟁의 참화를 겪고서 다시는 전쟁을 하지말자고 하고는 또다시 전쟁을 하는 우리 인간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 인간들의 자멸의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게나, 동생,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생존의 길을 찾아 진화되고 있는 걸세.”
“어떻게 진화된다는 겁니까?”
“그야 전쟁이 없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이왕 전쟁이 났다면 이겨야 생존하는 것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니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자체가 진화의 과정이 아닐까?
승리 중에 가장 큰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즉 부전승일세. 부전승은 그냥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덤벼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심어줄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그 능력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불안정하긴 하지만 평화가 있을 것이고 그 평화는 곧 인류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 아닌가?”
“무한한 경쟁과 힘의 균형, 끊임없는 긴장속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말씀이군요. 어쨌든 전쟁이 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되는 것이고...”
중국인 친구가 끼어들었다.
“인류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시대도 있었답니다.”
“원시공산사회를 말하는 거요? 그 시대를 진보된 문명이나 문화를 가진 공동체 사회로 볼 수 있을까?”
중국인 친구의 말에 ‘원시공산사회’라고지례 짐작하여 말했다.
“글쎄요, 그게 원시공산사회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황금시대(the golden age)라 하여 그 시기에는 병장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걸 보아 전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인간이 질병과 고통이 없어 수 백살 무병장수하며 살았다 합니다.”
“황금의 시대? 수명이 수백살? 그런 시대는 바로 하늘나라 이곳이 아닌가요?”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형님 그 ‘황금시대’라는 곳도 여행하도록 해보시죠?”
“계획을 세워봄세~, 우선 파묻힌 진실부터 확인해보고”
”사마천이가 이 시대를 목격했다면 그렇게 왜곡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황제헌원도 가히 화족의 시조에 걸맞은 추앙받을 만한 위대한 영웅호걸임은 틀림없었네만. 아마 사마천은 대대로 추앙받고 있는 헌원의 위대함을 유지하기 위해 치우천황과 헌원의 역할을 바꾸어 기록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야.”
.....
“잠깐만요.”
중국인 친구가 끼어들었다.
“뭔가요? 형씨?”
“태사공이 그렇게 쓸 수 있었던 단초가 있었습니다.”
“단초라니?“
“헌원황제가 오리무중의 안개속에서 지남거를 이용하여 천황의 포위망을 뚫는 전투에서 천황이 아끼는 치우비라는 장수가 전사하고 헌원황제가 그 시신을 군영에 걸어놓은 것에 대해 천황이 크게 분노한 사실이 있었잖습니까? 천황은 복수하고자 마지막 전투에서 신무기인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헌원의 요쇄를 공격하여 마침내 헌원황제의 항복을 받았잖습니까?” “오호!, 치우비와 치우를 착각했다 이 말이구먼~”
“결과적으로 억지춘향격으로 화족의 자존심을 살리려고 역사를 왜곡 날조하였군요. 그래도 팔신제 등을 기록한 것을 보니 너 나(彼我)를 불문하고 치우천황이 모든 종족으로부터 군신으로 추앙받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곡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게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셈이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으로서의 마지막 양심이었을까?”
“사관으로서의 양심? 글쎄요, 무심결에 기록한 실수일 수 도 있겠지요. 형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사공 사마천이라 해도 그렇게 기록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허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뿐이다.’ 이 말씀이구먼...그런데 동생 우리나라에는 치우천황을 기리는 사당이나 행사 같은 것 없었나?”
“제가 알기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일전에 학생들을 데리고 용산 전쟁박물관을 관람했는데, 거기서 치우천황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배달국 천황님이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그래? 그게 뭐였지?”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가마나 군대의 대장앞에 세우는 기가 있는데 이를 둑(纛)이라 했습니다. 군신 치우천황님을 상징하는 깃발이라 했습니다. 그 모양이 귀면와(鬼面瓦)의 귀신형상이고 소의 꼬리나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 일명 대조기(大早旗)라 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출정에 앞서 반드시 깃발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둑제’라 했으며 각 지방에 둑소를 두어 평시에는 국가의 년중 행사로 제사를 지냈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 난중일기에 충무공께서 세 차례의 독제를 거행한 기록이 있었어. 그게 바로 치우천황을 기리는 행사였구먼.”
“맞아요. 또 있습니다. 궁궐에 가면 출입구나 다리 등에 잡귀가 근접하지 못하도록 귀면상을 조각해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치우천황님을 형상한 것입니다. 귀면와의 그 모습자체가 바로 치우천황님이었던 셈입니다.”
“음~ 지붕에 귀면와를 장식한 이유가 잡귀를 쫓는다는 것인데 귀신도 무서하는 것이 바로 치우천황님이셨구먼”
“선생님, ‘붉은 악마’도 있잖습니까? 대한민국 짜잔짠~ 하던거...”
“붉은 악마?”
동생과 나는 거의 동시에 감전되듯 되물었다. 이어 동생이 말한다.
“맞습니다. ‘붉은 악마’의 상징이 치우천황님이었습니다. 깃발이나 현수막에 치우천황님의 형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게 치우천황님인 줄 몰랐네. 무섭기는커녕 웃음이 지어지는 귀여운 느낌마저 들어 ‘귀여운 악마’라 혼자 명명했지만,”
“귀여운 악마,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사자나 호랑이 등 무서운 동물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할 때 천진난만한 모습이거나 해학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동물일지라도 인간과 쉽게 어울릴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말해주는 우리 조상님들의 여유로움의 깃법이 아니겠습니까? 해서 악마라고 해서 반드시 무서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2002년 월드컵 때 정말 대단했잖습니까? 저는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수십만의 일사불란한 응원모습과 하늘이 놀라 뒤 흔들릴 함성, 엄청난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랬지. 세계 응원역사를 다시 쓰게 했었지. 그런데 동생, 왜 하필이면 ‘붉은 악마‘라 했지? ’붉은‘은 이해가지만 치우천황님이 ’악마‘는 아니지 않는가? 적에게는 악마일지 모르지만 우리 스스로가 악마라 칭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 같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우리 청소년 대표팀을 현지 언론에서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지만, 아무래도 악마와 치우천황님과는 격이 맞지 않습니다.”
“적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하자는 의미에서 ‘악마’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흐흐 사마천은 치우천황이 ‘악마’같이 두려웠던 가 봅니다.”
동생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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